온통 위기의 목소리뿐입니다. 밖으로는 금융과 재정 위기가 ‘도미노’처럼 세계로 번집니다. 세계 정치와 경제를 주무르는 강국들도 휘청거립니다. 안으로는 정치와 경제 위기가 고조됐습니다. 정치권은 국민 불신이 극에 달해 존립 자체를 위협받습니다. 경제 위기는 더욱 심각합니다. 공공, 가계, 기업을 가리지 않고 불어나는 부채에 허덕입니다. 3대 경제 주체 금융부채가 3300조원에 이른다니 말 다했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우리 경제를 이끈 정보통신기술(ICT) 산업마저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미국 애플과 구글의 거친 공세에 우리 대표 기업들은 넋이 나갔습니다. 중소벤처기업들은 좀처럼 활로를 찾지 못합니다. ‘ICT 코리아’라는 바깥의 찬사도 빛바랜 옛 영광처럼 들립니다.
이렇게 된 게 글로벌 경제 위기 때문일까요. 애플과 구글 탓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불러들인 위기입니다.
대기업들은 ICT 코리아를 만든 주역입니다. 그런데 영광에 너무 빨리 취했습니다. 자만 속에 정작 할 일을 소홀히 했습니다. 같이 가야 할 협력업체를 수익 보전 수단으로만 여겼습니다. 기술벤처의 참신하고도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무시했습니다.
규모를 갖춘 기업들도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벤처 생태계를 만드는 참신한 시도보다 대기업의 그릇된 관행만 좇았습니다. 우리나라 벤처자본도 당장 수익을 안겨 줄 만한 기업 외에는 눈길도 주지 않습니다. 잠재력 풍부한 기술벤처가 정작 국내가 아닌 외국 벤처자본의 유혹을 받습니다.
앞, 뒷문이 꽉 막힌 기술벤처 옆에 애플과 구글, 페이스북이 살며시 다가왔습니다. 우리가 외면한 기술벤처가 미국 기업의 생태계에 들어갔습니다. 이들이 결국 부메랑이 됐습니다.
정부는 ICT 자체를 외면했습니다. 산업이 이미 성숙했다고 오판했습니다. 지원 없이 잘 굴러갈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잘하는 분야를 더 육성하기는커녕 전통 산업의 보조자로 격을 낮췄습니다.
선진국도 ICT 각 분야에서 글로벌 기업 하나를 배출하기 힘듭니다. 우리나라는 반도체, LCD, 휴대폰, TV, 백색가전 등 주요 분야에서 두 개 이상의 세계적인 기업을 뒀습니다. 세계 모든 나라가 이를 부러워하는데 정작 우리만 부정하는 꼴입니다.
이 지경이 될 동안 전자신문은 과연 무엇을 했느냐는 비판이 나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정부가 그릇된 방향으로 가는데도 제대로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대기업이 비즈니스 생태계를 만들어 협력사와 기술벤처가 공생하도록 만드는 마당 구실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숨겨진 보석 기업을 발굴해 세상에 알리는 역할도 기대에 못 미쳤습니다. 창간 29주년을 맞은 오늘 독자 여러분께 이렇게 무릎 꿇고 통렬히 반성합니다.
우리 ICT 산업이 위기라곤 하나 기회가 없는 게 아닙니다. 애플과 구글 쇼크 덕분에 정부는 정신을 차렸습니다. 정치권도 다시 관심을 기울입니다. 대기업들은 바짝 긴장하고 그간의 오류를 반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나오는 기술벤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의 역량을 극대화할 때 옛 영광을 다시 찾아올 수 있습니다.
당장 필요한 것은 자신감과 자존감의 회복입니다. 우리 ICT 제조업은 미국과 일본, 중국과 대만 기업의 끊임없는 견제와 도전, 협공에도 이렇게 성장했습니다. 세계 ICT 역사를 다시 쓴 기술과 서비스를 만든 창의적 유전자도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외국 기업의 견제가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는 것은 곧 그만큼 우리 기업의 역량과 잠재력을 두려워한다는 방증입니다. 스스로의 힘을 믿지 못하거나 평가절하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전자신문은 자신감과 자존감 회복이 우리 ICT 산업계에 들불처럼 번지도록 앞장서겠습니다. 이 들불은 우리 경제와 사회로 번져나갈 것입니다. 우리 산업이 가야 할 미래를 제시하며, 업계와 같은 꿈을 꾸고, 같이 뛰겠습니다. 내년 창간 30주년을 벅찬 희망 속에 맞을 수 있도록 전자신문이 독자 여러분께 드리는 약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