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통신회담(8)
세상일이 다 그렇듯 위기와 기회는 공존한다.
한미통신협상은 한국에게 위기이자 기회였다.
‘통신시장을 미국에 내 줄 것인가. 아니면 경쟁력을 키워 통신강국으로 도약할 것인가.’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
1994년 2월 2일 수요일.
설날을 며칠 앞둔 영하의 세밑이었지만 우루과이라운드(UR) 협정비준을 거부하는 전국 농민 수만명이 서울 종로구 대학로 등지에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체신부는 이날 통신개방에 대비, 제2차 통신사업 구조개편 작업에 착수했다. 통신시장 지각변동을 알리는 서곡(序曲)이었다.
체신부는 2차 통신사업구조개편계획을 심의·조정할 ‘통신사업구조개편추진협의회’와 실무개편 작업을 진행할 ‘구조개편추진단’을 각각 발족했다.
통신사업구조개편추진협의회 위원은 학계 4명과 연구계 3명, 언론계 2명, 통신업계 6명 등 15명으로 구성했다. 위원장은 김세원 서울대 교수(통신개발연구원장,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 역임)가 맡았다.
추진협의회가 할 일은 △통신사업자의 구분방식을 재검토해 통신사업자 별 업무영역을 재조정하고 △통신사업자의 수와 자격 등 진입규제를 완화하며 △전화·전용회선 등 기본통신분야의 경쟁촉진방안 △개인휴대통신(PCS) 등 신규서비스에 대한 사업정책 방향을 검토하고 △전기통신사업법 등 관계법령개정방향 등 구조개편 계획 전반을 심의·조정하는 일이었다.
개편추진단은 체신부와 통신개발연구원(현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전자통신연구소(현 ETRI) 실무자 등 11명으로 출범했다. 단장은 체신부 박성득 통신정책실장(정통부 차관 역임, 현 한국해킹보안협회장)이 맡았다.
체신부가 개편안추진단을 구성한 이튿날인 2월 3일과 4일 이틀간 한미 양국은 워싱턴DC 미 무역대표부(USTR)에서 협의회를 열고 부가통신서비스와 표준, 합의사항 이행여부 등에 관해 논의했다. 한국 측에서 임정재 체신부 통신협력단장(기술심의관, 한국통신기술협의회 사무총장 역임)과 미국 측에서 피터 콜린스 USTR 한국담당과장이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미국 측은 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통신시장 개방 압력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윤동윤 체신부 장관은 이에 앞서 1월 13일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체신부 새해 주요업무를 보고하면서 ‘통신사업구조개편 구상’을 밝혔다.
윤 장관은 “통신사업의 민영화와 경쟁 확대로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고 정보통신산업을 개방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구조개편 전담반을 구성해 상반기 중에 통신사업구조개편안을 마련하겠다”고 보고했다.
윤 장관은 새해 주요업무계획으로 △정보통신산업 국제화 △통신산업 경쟁력강화를 위한 규제 완화 △국가사회 정보화 촉진 △정보통신기술 개발 강화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 △무선통신활성화 △국민의 통신이용 편의 증진 △우정사업의 경영쇄신 및 자립기반 조성에 역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윤동윤 장관의 회고.
“통신시장 개방에 국내 기업이 살아남으려면 통신사업구조 개편은 불가피했습니다. 그러자면 규제는 풀고 경쟁을 확대해 국내 통신업체의 경쟁력을 강화시켜야 했습니다. 김 대통령은 체신부 보고에 대해 ‘엄격하게 하라’고 지시했어요.”
윤 장관은 1993년 2월 장관에 취임하자 매주 수요일 오전 장관실에서 윤창번통신개발연구원 박사(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 하나로텔레콤 회장 역임, 현 김앤장 고문)와 조신 박사(SK브로드밴드 사장 역임, 현 지경부 R&D전략기획단 정보통신분과 투자관리자), 최병일 박사(현 이화여자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등과 정보통신의 미래와 추진 정책에 관한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토론한 내용은 정책에 반영했다.
추진단은 그해 6월까지 통신사업구조개편안을 확정짓기로 했다. 단장 아래 이인표 체신부 정책심의관(정통부 정보통신진흥국장, SK텔레콤 감사 역임)과 주현정 통신업무과장(부산체신청장, LG텔레콤 감사 역임), 강문석 사무관(정통부 정책기획과장, 현 LG유플러스 부사장)이 실무라인이었다.
개편안의 실무는 강 사무관이 담당했다. 그는 1989년 여름부터 미국 하바드대학에서 2년간 유학하면서 미국의 통신제도를 연구했다. 미국은 그 당시 이미 독점이 아닌 경쟁체제를 도입해 그는 논문도 이런 내용으로 작성했다.
전담연구팀장은 통신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인 조신 박사가 임명됐다. 조 박사는 최선규 박사(현 명지대학교 디지털미디어학과 교수)와 최병일 박사, 정윤식 박사(현 강원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등 5~6명과 같이 진행했다.
조 박사의 회고.
“당시 개편안의 핵심은 크게 3가지였습니다. 규제완화와 이동통신사업자와 시외전화 등 경쟁 확대, 그리고 신규 서비스 도입 이었습니다. 연구팀은 이 분야를 중점 연구했습니다. 외국의 사례를 조사하고 국내 전문가들과 심층 토론을 하면서 구체안을 마련했습니다. 이 과정에 체신부에서 별도 주문은 없었습니다. 학자 관점에서 열정을 갖고 통신사업구조개편안을 소신대로 만들었습니다.”
조 박사 팀이 마련한 구조개편 시안(試案)은 전문가 토론회를 갖고 기존 통신사업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했다.
통신개발원은 3월 10일부터 12일까지 2박3일 간 충남 도고에 있는 한국통신(현 KT) 수련관에서 한국통신과 데이콤 등 일반 통신사업자, 한국이동통신·신세기이동통신·한국항만전화·제2무선호출사업자 등 특정 통신사업자, 부가통신사업자, 대학 교수, 전자통신연구소 등 6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문가 토론회를 개최했다. 참석자들은 △통신사업구조 개편 방향 △기본통신시장 경쟁도입 △신규서비스도입문제 등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조 박사의 말.
“연구팀은 이들과 가진 심층토론 내용을 개편안에 반영하고 그 후에도 수시로 이들의 의견을 수렴해 이를 시안에 반영했습니다. 연구팀은 경쟁 도입은 피할 수 없는 대세라고 판단했습니다. 시외전화 경쟁을 놓고 한국통신과 데이콤이 첨예하게 대립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별 일도 아닌데 그 당시는 논쟁이 치열했습니다.”
구조개편안은 추진협의회 심의를 거쳐 그해 5월 30일 오전 국회에서 당정협의를 했다.
윤동윤 장관은 당정협의에서 “PCS서비스는 조속한 국내기술개발과 서비스제공을 위해 사업자를 조기 선정하되 사업자수는 주파수여건과 초기투자부담을 감안, 1개사업자를 우선 허가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윤 장관은 시외전화 경쟁도입여부는 △독점유지 △대외개방에 연계한 경쟁도입 △가능한 조기 전면자유화 등 3가지 방안을 놓고 국민편익증진, 통신사업경영합리화, 대외개방대응, 보편적서비스유지, 공익성 투자재원확보 등을 종합 검토해 결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윤 장관의 회고.
“개편안에서 PCS사업자는 1개만 선정하기로 했어요. 당시 현재와 같은 통신3강 체제를 구상했습니다. 1개인 PCS사업권은 명문화는 안했지만 한국통신에 주기로 정리를 했습니다.”
체신부는 그해 6월 8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회관 2층 국제회의실에서 통신사업구조개편안에 대한 공청회를 열었다. 산·학·연 및 언론계·시민단체 등 각계의 최종 여론을 수렴하기 위한 자리였다.
연구팀장인 조신 박사의 개편안 발표에 이어 학계에서 이성순(성균관대) 교수와 진용옥(경희대) 교수, 언론계에서 변도은(한국경제) 주필, 연구계에서 이한구(대우경제연구소) 소장, 시민단체에서 유재현(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 소장, 통신업계에서 김주용(한국전파진흥협회) 회장, 중소기업대표로 최동규(중소기업연구원) 부원장 등이 토론자로 참석했다.
토론자 발언 요지를 들어보자.
▲유재현 소장=PCS서비스는 초기에 1개 사업자만 지정하면 효율성은 있지만 공정성과 경쟁력 제고, 경쟁을 통한 국민편익증진 등의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처음부터 복수경쟁이 바람직하다. 시외전화도 개방화에 대비한 경쟁력제고를 위해 경쟁도입이 옳다.
▲변도은 주필=PCS는 국내시장규모 등에 비춰 볼 때 초기 개발단계부터 복점이 바람직하며 기술도 공동개발 할 수 있다. 신규서비스분야에서 독점을 전제로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시외전화경쟁은 먼저 시내·외 요금 조정이 필요하다.
▲진용옥 교수=PCS는 사업자를 미리 선정하는 것보다 개발자 우선원칙과 누가 먼저 기술개발을 하느냐에 따라 사업자를 선정해야 한다. 국산고유기술을 확보해 기술종속을 피해야 한다. 도입기술에 의한 다수의 서비스업자가 나올 경우 중복투자에 의한 낭비요인이 된다. 시외전화경쟁은 바람직하나 번호문제 때문에 신규사업자에게 불리한 불공정경쟁이 되기 쉽다. 새로운 번호체계에 의한 경쟁도입이 요구된다.
▲최동규 부원장=PCS는 원천기술 측면에서 일반전화망에서 접근하는 방법과 셀룰러 이동전화망에서 접근하는 방식 등 상이한 방식이 있다. 원천기술을 갖고 있는 사업자에게 허용해 경쟁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시외전화를 포함한 모든 부문에서의 경쟁원칙을 지지한다.
▲이한구 소장=PCS는 제대로 경쟁이 되도록 초기사업자도 경쟁을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가통신설비 보유자는 공기업으로 고유목적에 충실해야 한다. 직접 통신사업에 참여하면 공정경쟁이 안되고 자원낭비를 초래할 것이다.
▲김주용 회장=PCS는 초기사업자수를 제한할 게 아니라 유선망사업자와 무선망사업자 간에 경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외경쟁은 원칙적으로 찬성하나 사전요금조정이 필요하다.
▲이성순 교수=PCS의 경우 통신개발연구원의 개편안은 경제논리가 부족하다. 경쟁으로 인한 낭비보다 긍정적 효과가 다 크다.
체신부는 이런 과정을 거쳐 그해 6월 30일 2차 통신사업구조개편안을 확정, 발표했다.
2차 구조개편안은 한국통신산업의 미래상이었다. 국내 통신사업의 2차 구조개편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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