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법에서 '부랑인'은 왜 사라졌을까

복지부, 부랑인 표현 배제한 노숙인 지원법안 마련

국립국어원 "정확한 표현 찾는 공공영역의 고민은 필요"

보건복지부는 노숙인과 부랑인 지원 정책을 일원화하기 위해 올해 초 마련한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 지원에 관한 법률`에서 부랑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독립적으로 법률을 입안하는 과정 자체가 쉽지 않았고 앞으로도 구체적인 시행령 마련 등을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남아 있다"며 그간 논의과정이 쉽지 않았음을 내비쳤다.

정부는 왜 `부랑인`인 대신 노숙인이란 표현을 사용하려 했고 그 과정은 왜 쉽지 않았을까.

◇`노숙인`은 `부랑인`의 진화형 = 노숙인과 부랑인이 지칭하는 대상은 실상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올해 4월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기 전까지 정부는 두 대상을 규칙으로 명확히 구분해 사용했다.

지난해 12월 시행된 `부랑인 및 노숙인 보호시설 설치·운영 규칙`에는 노숙인과 부랑인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가 담겨 있다.

규칙에 따르면 부랑인(浮浪人)은 `일정한 주거와 생업수단 없이 상당한 기간 거리에서 배회 또는 생활하거나 그에 따라 부랑인 복지시설에 입소한 18세 이상의 자`를 말한다.

반면 노숙인(露宿人)의 정의에는 생업수단에 대한 조건이 빠져 있다. 같은 법령에서 규정한 노숙인은 `일정한 주거 없이 상당한 기간 거리에서 생활하거나 그에 따라 노숙인 쉼터에 입소한 18세 이상의 자`다.

부랑인이 곧 일반적으로 생업능력이 결핍된 자를 폭넓게 지칭한다면 노숙인은 최소한의 노동력을 확보한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폭넓은 개념인 셈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부랑인은 이전부터 있던 표현인 반면 노숙인은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IMF 등 경제위기가 반복되면서 새롭게 등장한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노숙인과 부랑인은 이렇듯 표현상으로는 분명 확연히 구분할 수 있지만 현실은 달랐다. `일정 주거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자`의 생업능력 여부를 정확하게 판단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고 큰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부랑인 지원은 중앙정부에서, 노숙인 지원은 해당 지자체에서 담당했기 때문에 `일정 주거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자`에 대한 구분은 지원 소관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었다.

복지부 관계자는 "노숙인과 부랑인 구분이 쉽지 않아 결국 부랑인 시설 입소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노숙인으로 해석하고 지자체에서 지원했다"며 "부랑인과 노숙인의 구분을 없애고 효율을 높이기 위한 정책 통합의 필요성이 대두한 것도 이 같은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부랑인` 표현 없앴더니 예산 문제 봉착 = 복지부는 지난 4월 이 같은 문제점을 반영해 부랑인과 노숙인 지원 정책을 통합하고 부랑인이란 표현을 배제한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 지원에 관한 법률`을 마련했다.

그러나 문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생했다. 법안에 부랑인이라는 표현이 빠지게 되면서 마치 복지부가 이전까지 추진해왔던 부랑인 자활사업을 중단하는 듯한 모양새가 된 것이다.

기획재정부는 법안에 `부랑인`이라는 표현이 없다는 이유로 매년 이어졌던 부랑인 자활사업 예산 지원에 난색을 표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노숙인과의 개념 중복 문제, 부정적 뉘앙스 등으로 부랑인이란 표현은 자제하기로 했지만 기재부에서 예산 지원이 곤란하다고 해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복지부는 기존의 부랑인 복지시설을 노숙인 복지시설로 본다는 조항을 포함해 다양한 근거를 들어 기재부 설득에 나섰고 결국 기존 정책과의 연속성을 인정받아 필요한 예산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아직 문제는 남아 있다. 새 법안이 노숙인으로 열거한 조건 중 `상당한 기간 주거로서의 적절성이 현저히 낮은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국토해양부에서 지원하고 있는 `비정형거주자`의 개념과 겹치기 때문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비정형거주자의 개념도 매우 다양해 명확한 구분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며 "국토부와 현재 관련 내용을 협의 중"이라고 말했다.

국립국어원의 한 연구원은 "부랑자보다는 노숙인이라는 표현이 비교적 가치중립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사실"이라며 "더욱 정확하고 쉬운 표현을 찾기 위한 공공영역의 이러한 고민은 필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