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융합연구가 대세다. 최근 떠오른 고령화와 기후변화 문제도 인간 유전자와 지구 환경만을 파고든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문제 발생이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학제 간 융합은 과학기술만이 아니라 인문사회 분야 교류까지 접목 영역을 확대시켜 놨다. 생명공학연구실 옆에 화가나 조각가 공방이 있다면 자연스레 서로 어울리며 식사도 하고 교류를 통해 창의적인 연구 아이디어를 공급받을 수 있다. 연구원과 예술가의 만남은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될 수 있다.
미국 뉴욕시에 소호라는 마을이 있다. 처음엔 황폐했지만 지금은 지식·문화 중심지로 변모해 있다. 1970년대 소호 동네에는 텅빈 창고가 많았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공방을 열었고 성공한 예술가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막 같던 길거리에는 멋있는 카페가 생기기 시작했고 결국 이 예술가들이 동네를 교육·문화 중심지로 탈바꿈시켜 놨다.
연구기관도 마찬가지다. 연구기관 내에 예술가 활동공간이 생기면,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창의적 연구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 예술창작이라는 것이 과학기술 연구와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예술창작의 생태계는 기관 전체에 상상력을 부여할 것이다. 연구원들의 여가와 활기찬 생활을 만들어 가는데 크게 기여할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계가 예술가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또 있다. 사실 정보의 시각적 표현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과학자는 한국에 거의 없다. 하지만 이는 생물의학 분야나 다른 기술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이슈 중 하나다. 나노 수준의 물질, 분자 그리고 원자 분석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정보도 복잡다단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분자의 3차원적 특성을 이해하는 것만 해도 그렇다. 입체적인 이해에는 시각예술과 접목이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세포와 원자, 분자, 단백질을 시각적으로 잘 나타내면 그 특성과 정보를 좀 더 쉽게,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쉽게 이해하게 되면 그만큼 깊이 있는 단계로 몰입하는데 도움을 준다.
요즘 과학기술계가 생성하는 정보는 말 그대로 엄청난 양이다. 이를 처리하는 것도 과학기술계 과제다. 이 정보처리에는 애니메이션이나 영화·그림 등이 효과적일 수 있다. 정보 축적과 표현법을 빌려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정보를 매력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연구 또한 흥미롭고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10년간 정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R&D와 사업화 성공의 중요 변수가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연구기관 내에서 정보를 표현하는데 있어 뛰어난 감각을 지난 자들, 특히 예술가들에게 특별한 역할이 주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미적 감각은 연구실 내에서도 중요하다. 연구 진행을 개선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우선 연구실 자체가 어떻게 구성됐는지, 장비가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갖춰져 있는지를 신중히 따져보는 것이다. 종종 최고 수준의 연구기관을 살펴보면 연구원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고려 없이 설계된 경우가 의외로 많다.
이상적인 연구 환경을 꾸미려면 연구실 장비 이용 방법을 개선하고 부서 간 협력을 향상시키며 장시간 집중해야 하는 업무를 쾌적하고 스트레스 없게끔 설계해야 한다. 연구실에 혁신적인 인체공학적 디자인과 최첨단 IT 디스플레이를 도입해 획기적인 연구 환경을 조성할 수도 있다. 한국의 과학기술이 예술 문화와 합쳐진다면 큰 성과가 있을 것이다. 한국의 강점인 IT를 잘 활용한다면 과학기술도 예술도 모두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것으로 믿는다.
이만열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