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문명은 대체로 사각형이다.
사각형 건물에 있는 사각형 공간에 거주하며 사각형의 화면과 종이를 사용한다. 사각형의 가구나 전자제품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어떤 가수는 “지구본을 보면 우리 사는 지구는 둥근데…‘네모의 꿈’일지 몰라”라고도 했다.
그런데 사각형으로 점철된 인간 생활에 육각형 벌집 구조가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소재산업이나 제품에 응용돼 한 단계 진보한 결과를 낳는 것은 물론이고 사각형 일변도였던 건축물까지 서서히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벌집 구조 소재, 미래 과학의 키=‘제올라이트’는 모래 주성분인 ‘실리카’와 알루미늄 등으로 구성된 광물이다.
결정 내부에 작은 분자들이 드나들 수 있는 미세구멍이 뚫려 있다. 이 구멍으로 분자가 드나들 때 제올라이트는 일종의 촉매제로서 작용한다. 이 때문에 가솔린 생산 등 석유화학산업에 널리 이용되고 있다.
지난해 7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중요한 연구 성과를 하나 거뒀다. 기존 제올라이트 미세구멍이 작아 분자 확산 속도가 느리고 촉매 활성이 낮은 단점을 극복하는 제올라이트를 개발한 것. 우룡 KAIST 화학과 교수팀이 개발한 이 제올라이트는 ‘벌집 구조’를 응용했다.
2~50㎚(나노미터) 크기의 균일한 정육각형 모양 구멍이 규칙적으로 배열돼 있고 이 구멍들 사이 벽 내부에 1㎚보다 작은 마이크로 기공이 있다. 안정적인 벌집 구조를 띠고 있는 이 제올라이트는 분자 크기 문제 탓에 촉매로 사용하지 못했던 물질에도 사용 가능하다.
지난해 가임·노보셀로프 두 교수에게 노벨물리학상 영예를 안겨주며 ‘꿈의 신소재’로 불리는 그래핀은 상온에서 구리보다 100배 많은 전류를 실리콘보다 100배 빠르게 전달할 수 있고 빛 투과율이 98%로 투명하다. 완전히 구부려도 전도성이 그대로다. 그래핀은 탄소 원자가 벌집 구조 육각형을 이루며 한 층으로 펼쳐진 탄소 나노소재다. 플렉시블 터치스크린, 태양전지판 등 각종 미래 산업에 사용이 기대되는 그야말로 ‘꿈의 신소재’로 불린다.
◇정육각형, 제품 내구성 높인다=지난달 6일 한국 진출 10주년을 맞은 도시바가 선보인 울트라북 ‘포테제 Z830’은 더 가벼운 무게와 더 얇은 외형을 강조했다. 13.3인치형 제품이지만 1.09㎏ 무게로 경쟁사 동급 제품보다 17%나 가볍다. 두께는 가장 두꺼운 부분이 15.9㎜, 가장 얇은 부분은 8㎜에 불과해 서류 봉투에도 쉽게 들어간다.
하지만 이 제품은 얇고 가벼운 것은 내구성이 약할 것이라는 상식적인 짐작을 깬다. 벌집 구조를 응용했기 때문이다. 포테제 Z830 외부 케이스에는 뼈대 역할을 하는 육각형 벌집 구조로 된 고강도 마그네슘 합금 소재가 사용됐다. 뒤틀림과 충격에 강하면서도 가벼울 수 있는 이유다.
HP ‘엘리트북’도 벌집 구조 마그네슘 합금을 이용해 충격에 강한 강점을 내세운 제품이다. 사실 이 두 제품에서 사용된 벌집 구조 아이디어는 우주선에서 따온 것이다.
시속 300㎞ 이상의 속도를 내며 달리는 포뮬러원 ‘머신(경주용 자동차)’에서도 드라이버의 안전을 지켜주는 건 벌집 구조다. 머신 차체를 두 장의 탄소섬유판 사이에 정육각형 벌집 모양 알루미늄판을 끼워서 만든다. 두께 3.5㎜에 불과한 이 합성물질은 일반 철판과 견고함이 비할 수 없이 단단하다. 그 덕분에 머신은 윗면은 7.5톤, 측면은 3.5톤 충격에도 끄떡없는 운전석을 가지게 됐다.
비슷한 속도로 달리는 KTX 운전실 앞부분에도 벌집처럼 생긴 에너지 흡수장치가 있어 80%까지 충격에너지를 흡수한다. 이 같은 원리는 역으로 불의의 자동차 사고가 발생했을 때 보행자 부상을 줄이는 데 쓰이기도 한다. 가구의 나무 뒤틀림을 방지하고 아기 기저귀 뭉침을 막는 데도 벌집 구조가 응용되고 있다.
◇인간 건축물이 벌을 따라하기 시작=단위 도형당 넓이는 원이 가장 넓지만 이어 붙일 경우 쓸모 없는 공간이 생기고 그만큼 하중도 견디지 못한다. 삼각형이나 사각형은 벽면을 이루는 재료가 많이 드는데다 공간도 좁고 외부의 힘이나 충격에 쉽게 파괴될 수 있다. 하지만 정육각형 구조물은 외부로 힘이 분산되기 때문이 튼튼할 뿐만 아니라 벽면 재료도 적게 든다.
이런 장점이 건축가들에겐 오랜 연구대상이 됐다. 실제로 건축에 응용되기도 했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위치한 70m 높이 빌딩 ‘어반하이브’가 대표적인 예다. 풀이하면 ‘도심 속 벌집’이라는 의미다. 이 건물의 콘크리트 외벽에는 마치 벌집처럼 지름 1m 크기의 둥근 구멍 3771개가 뚫려 있다.
노출 콘크리트 벽 구조를 70m까지 건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콘크리트 무게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어반하이브 콘크리트 외벽 비밀 역시 벌집 구조다. 철근을 육각형으로 엮어 뼈대로 삼았다. 또 구멍을 뚫은 것이 콘크리트 양을 줄여 하중을 견디는 데도 일조한다.
영국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현대 건축물 중 하나인 ‘에덴 프로젝트’에도 벌집 구조가 쓰였다. 에덴 프로젝트는 세계 최대 규모의 식물원으로 ‘바이옴’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돔 8개가 모여 있는 구조다. 이 돔들의 크기는 반경 18~65m로 다양하다.
에덴 프로젝트 설계 당시 디자이너들이 받은 지시는 두 가지다. 최소 면적에 최대 식물군을 담고 최소 철골로 최고의 튼튼한 구조물을 지을 것. 그래서 나온 게 벌집구조로 이뤄진 돔이다. 수백개의 육각형 골조가 자연스레 반구를 이루는 이 구조물은 최고 100m 높이까지 돔을 지탱해준다.
1965년 헝가리 수학사 페예시 토트가 수천년에 걸친 연구사의 정점을 찍으며 “최소의 재료를 가지고 최대의 면적을 지닌 용기를 만들려 할 때 그 용기는 육각형이 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 수백만년 전부터 벌들은 자신의 집보다 30배나 무게가 나가는 양의 꿀을 저장하고 살았다. 인간이 벌집 구조를 생활에 적용에 더 윤택하게 한 건 불과 수십년이다. 자연에서 정복이 아닌 배움을 얻는 것이 아직 진행형인 셈이다.
제품 구조의 견고함과 소재 품질을 높이는 것에서 나아가 디자인에 적용되는 사례도 있다.
국내 스마트폰용 내비게이션 업체 록앤올이 내놓은 ‘김기사’ 기본 유저인터페이스는 벌집 모양이다. 방향과 거리를 눈에 쉽게 도식화하는 데 최적이라는 설명이다. 점차 사각형에 익숙한 인간의 눈과 사고방식까지 육각형을 좇아가게 될까.
황태호기자 thhw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