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온난화, 탄소배출 저감, 신재생에너지 개발로 이어지는 환경과 자원 문제는 전기에너지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다. 전기는 모든 에너지원의 종착지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전기를 보다 효율적으로 생산하고, 전달하고, 사용할 수 있을까. 한국전기연구원(KERI)은 지난 34년 동안 우리나라 전기 분야 연구와 기술개발을 선도해 온 중심 기관이다.
김호용 한국전기연구원장(59)은 “KERI의 연구과제 목표 달성률은 어느 출연연보다 높다. 이는 목표를 세우면 단합해 반드시 이뤄내는 KERI만의 전통이 있기 때문”이라 말했다. 김 원장이 연구원 시절 주도했던 `한국형 배전자동화와 배전용 전력기기 기술`은 포니 자동차 등과 함께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100대 기술로 뽑혔다.
김 원장이 올해 내놓은 KERI 진로는 `융합연구를 통한 세계 최고의 전기 연구기관`이다. 그는 “기술 간 융복합이 더 빠르게 진행되고 새로운 형태의 기술과 서비스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며 “새로운 시대적 요구와 추세에 맞춰 KERI 고유 임무에 부합하는 핵심 연구영역을 재정립하고 세계 최고가 가능한 융합연구 분야로 연구방향을 집중하기 위해 조직을 재정비했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연구원다운 연구원을 강조했다. “전기연구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연구원 냄새가 나는 연구원`이라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이제는 KERI의 냄새에서 좋은 엑기스를 뽑아 연구 향기를 물씬 풍기는 연구원을 만들고 싶다.”
김 원장의 새해 새설계다.
-KERI에서 26년간 재직해 온 전문 연구원 출신으로 원장이 됐다. 취임 5개월이 지났는데 소감은.
▲1986년 당시 KERI는 전기통신연구소에서 전기연구소로 분리·독립해 전기 R&D를 시작했습니다. 내 삶의 전부를 보내다시피 한 KERI에서 원장이라는 막중한 자리를 맡으니 남다른 책임과 의무감을 갖게 됩니다.
연구원 시절부터 느꼈지만 KERI는 조용하지만 목표를 정하면 달성을 위해 매진하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연구원입니다. 전기 분야 연구개발은 해마다 양적·질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시험인증 분야는 세계 3대 공인시험기관의 하나로 인정받을 정도로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임직원 모두 주어진 목표에 동참해 달성하려는 의지와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올해 KERI 핵심 사업은.
▲저탄소, 고신뢰성, 융복합이라는 큰 틀에서 차세대 전력망, 초고압직류전송(HVDC), 융복합 의료기기, 전기추진, 전기기기 시험인증, 나노기반 전기신소재 개발을 중점 추진합니다. 대학이나 기업과 차별화한 분야이자 세계 최고가 가능한 분야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연구 분야는 전력계통의 효율성과 신뢰도 제고를 위해 `차세대 전력망 기술`과 `HVDC 기술` 개발을 추진합니다. 전기차, 전기선박 등 전기추진 분야 연구에도 상당부분 재원과 역량을 투입할 계획입니다. 이미 관련 3대 핵심 기술인 2차전지, 급속 충·방전시스템, 제어시스템기술을 상당부분 확보한 상태입니다.
시험분야는 국내 중전기기업계의 숙원 사업이자 KERI 설립 이후 최대 사업이 될 4000MVA 대전력시험설비 증설사업을 오는 2015년까지 총 16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추진합니다.
-출연연 조직 개편과 함께 융합연구가 화두인데 융합연구는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추진하나.
▲각 분야 연구조직에 이종 분야의 내부 전문가를 섞어 융합연구에 나설 수 있도록 조직을 신설·보완했습니다.
신설 HVDC연구본부는 전력전자 전문가와 초전도 재료전문가, 케이블, 차단기 등 전력기기 전문가, 전력반도체 전문가가 모여 융복합 연구를 진행한다. 전기추진연구본부 또한 전력전자, 전동력, 펄스파워, 플라즈마 전문가들이 함께 차세대 추진(교통, 물체가속)기관과 환경 및 국방관련 융합기술을 개발합니다.
첨단의료기연구센터는 초전도 MRI관련 기술분야 그룹과 가속기 및 전자빔 그룹이 뭉쳐 세계 최초의 `휴대용 MR기반 전자빔 선형가속 치료기기`를 개발할 계획입니다.
이와 함께 미래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창의원천연구본부를 신설했습니다.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자유로의 주제 아래 창의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입니다.
-KERI 연구분야 중 세계 최고에 다가섰고, 또 세계 최고가 가능한 분야는.
▲이미 탄소나노튜브(CNT) 투명전극제조기술, 나노노광장비, 세계 최고 성능의 2세대 고온초전도선 등 관련 업계와 연구계가 주목한 원천기술을 개발, 기업에 이전하고 상용화했거나 상용화 과정에 있습니다.
이외에 대전력시험기술, 반도체소자 기반 펄스전원, 나노하이브리드 융합소재 등이 글로벌 경쟁력 확보가 가능한 선도기술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최근 거둔 가장 의미 있는 성과는 시험인증분야의 2가지, 즉 세계 중전기기 산업계의 `G10`이라 할 수 있는 세계단락시험협의체(STL) 정회원 자격 획득과 4000MVA 대전력시험설비 증설사업에 착수합니다.
2개 모두 기업의 연구개발 활성화와 중전기기 수출에 긍정적인 영향을 안겨 줄 결과물입니다. 네덜란드의 KEMA를 능가하는 세계 제일의 전기전문 국제공인 시험·인증기관의 위상을 달성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취임사에서 “일관성 있고 지속적인 평가제도를 운영해 전 직원이 건전한 긴장관계 속에 경쟁하며 세계적인 연구 능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는데.
▲연구과제 선정은 기관 임무에 부합하는 주제로서 기업보다 적어도 수년 이상 앞선 기술인가(독창성, 선진성), 세계 최초·최고의 기술로 발전할 수 있는가(신시장 창출, 기대효과)에 초점을 맞춰 선정·평가할 계획입니다. 이미 올해 주요사업 선정에서 이 방침을 적용했습니다.
개인평가는 연구 활동과 성과를 기존 수치 중심의 정량적 평가에서 연구과제의 실질적 수행내용을 평가하는 `과제중심 정성적 평가제도`로 전환했습니다.
공정성에서 약간의 이의 제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일관성 있게 지속적으로 추진하면 과제 수행팀 내에 협력 분위기가 조성되고, 팀 간 건전한 경쟁관계를 정착시켜 나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김도연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장은 지난 달 19일 KERI에서 출연연 개편안을 설명하며 출연연의 문제로 우수인재 확보 부족, 고령화, 환경변화에 대한 대응력 부족을 꼽았는데.
▲말씀하신대로 출연연 공통의 문제이며, KERI도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KERI는 첨단 융합기술을 선도해 나가야 한다는 면에서 우수인재 확보를 기관의 미래를 결정하는 핵심요소로 보고 있습니다.
매년 상·하반기 정기채용과 별도로 국내외 박사학위자 중 탁월한 연구능력을 보유한 자를 대상으로 상시 채용 활동을 진행 중입니다. 해외 우수연구자 확보를 위해 2010년부터 매년 `한미 과학기술학술회의(UKC)`에 참가해 인재유치 활동도 펼치고 있습니다.
또 과학기술연합대학(UST)에 KERI 베테랑 책임연구원이 교수, 강사로 학생을 지도·강의하면서 우수학위자를 발굴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근무하고 싶은 KERI`를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기존 임직원의 노력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전 임직원이 합심해 KERI의 역량을 높이고, 가치를 창조하는 전기전문 연구기관이 된다면 우수 인재는 자연스럽게 모일 것입니다.
고령화, 환경변화에 대한 대응 문제는 명예퇴직제도, 강소형 미션 중심의 조직개편과 조직문화 정립, 임직원의 전문성 확보 등을 통해 해결해 나갈 것입니다.
-지난해 전기연 창립 34주년 기념식에서 `경쟁이 없으면, 경쟁력도 없다`는 말로 전기연 연구원간 건전한 경쟁을 통해 고유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받는 출연연을 만들자고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단기성과 위주의 경쟁이 출연연과 같은 연구분야 조직에는 양날의 칼처럼 작용할 수도 있는데.
▲연배나 인정, 관계 등에 따른 인사가 아니라 능력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공정한 평가를 통해 적임자를 발탁하겠다는 뜻입니다. 즉, 기관의 미션과 전략방향에 맞는 사업을 선정한 후 가장 우수한 책임자 또는 집단에 맡기고, 그 성과에 대해 공정하게 평가하고 보상하는 것이 기관장인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한 말입니다.
연구기관의 존재이유는 실용적 가치를 창출하는데 있습니다. 이는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입니다. 단순히 연구성과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계에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적극 확산시켜 나가는 것이 출연연의 중요한 미션입니다.
단기성과 위주의 경쟁이 아니라 가치를 창조하는 전문연구기관으로 존재감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수요자 중심 연구를 강화해 나가겠습니다. 연구과제의 선정, 평가에서 이를 반영해 국가와 산업계의 요구에 맞는 연구성과를 창출하겠습니다.
창원=임동식기자 dsl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