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정의 그린로드]기업인수 불발이 다행인 이유

올 초 스마트그리드 업계에 기업 인수 소식이 있었다. 인수하려는 기업은 학원과 온라인교육 사업을 하는 기업이었고 피인수기업은 전력량계 기업이었다. 순간 `왜 했을까`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인수하려는 기업이 스마트그리드와는 상관없을 것 같은 학원사업과 온라인교육을 하는 기업이기 때문이었다. `인수를 하면 어떤 시너지가 있을까`하는 의문과 함께 `혹시 우회상장을 노린 것인가`하는 생각에 10여년 전 벤처·인터넷 붐 시절이 스쳐지나갔다.

벤처 붐 당시 많은 기업이 생겼다가 없어졌다. 기업의 미래를 보고 순수하게 투자하는 엔젤도 있었지만 일확천금을 노린 기업사냥꾼도 활개를 치던 시절이다. 적절한 인수합병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벤처기업으로 성장한 사례도 있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진 기업이 훨씬 많다. 기발한 비즈니스모델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신생 벤처기업이 한 순간의 판단 실수로 투자 유혹에 빠져 기업도 명예도 모두 잃는 사례는 다반사였다.

듣도 보도 못한 닷컴기업이 혜성처럼 나타나 거액의 투자자금을 유치하고, 코스닥에만 상장하면 자금이 몰리고 주가가 천정부지로 오르던 시절. 기업 사냥꾼에겐 물반 고기반의 사냥터가 차려진 셈이었다. 상장한 기업이지만 실적이 좋지 않은 기업과 잘 나가는 신생 IT기업을 합병해서 쓰러져가는 상장사를 첨단 IT기업으로 재포장하는 것은 가장 흔한 작업이었다.

화학적 결합을 통해 견실한 기업으로 재탄생하면 더 말할 나위 없겠지만 이런 과정을 거친 기업 대부분은 끝이 좋지 않았다. 주식과 자본 문제, 여기에 경영권 문제까지 얽히면서 참신한 IT기업의 기술과 비즈니스모델이 사라지고 상장기업은 상장폐지라는 참혹한 결과로 이어진다. 2000년대 들어 닷컴·정보보호 업계가 이런 일로 시끄러웠다.

5~6년 전엔 반도체 업계에도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요즘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를 대체하는 주기억장치로 떠오른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분야다. 국내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 SSD기업에 예능 관련 기업이 관여하면서 경영권 문제까지 터졌고 결국 와해되고 말았다. 창업자 입장에서는 경영권을 지키지 못하고 내준 아픔이 있겠지만 산업 생태계가 잃은 것은 더 크다. 기술을 주도하던 기업이 사라졌고, 그런 기업이 없어진 탓에 기술진보가 더뎌져 국가 산업 경쟁력에도 피해가 갔다.

스마트그리드 업체 인수 소식을 접했을 때 느낌이 딱 그랬다. 하지만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적자 상태이기는 하지만 업계 1위 기업이고 상장기업이라는 점은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인수규모는 160억원 수준이었다. 주당 인수가격은 당시 피인수 기업 종가보다 2.5배 높았다. 과하다 싶기도 했다. 인수하기까지 자금 부담은 있겠지만 스마트그리드 산업이 개화할 것을 생각하면 감수할 만한 부담이다. 성공적인 사업다각화 모델이 될 수도 있었다.

지난주 초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다. 인수하려던 기업이 계약 해지 내용을 담은 공문을 보내면서 `없었던 일`이 됐다. 이유는 간단했다. 인수를 위해 정밀 실사를 해 보니 애초에 생각했던 인수금액을 지불할 만큼 기업가치가 없다는 판단을 얻었기 때문이다. 인수가격 조정도 불발로 끝났다. 피인수기업도 생각하지 못한 하자가 있었고 인수하려는 기업도 160억원이라는 목돈을 지불하기엔 부담이 컸던 것 같다.

두 기업 간 벌어진 일은 해프닝으로 끝날 가능성이 커졌다. 제 3자 입장에서 봤을 땐 오히려 다행스럽다. 생각하는 지향점이 서로 다른 기업이 만나 둘 모두 불행해지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말이다. 이 정도 선에서 멈춘 것이 두 기업에 `독`보다 `약`이 되었으면 한다.

주문정 그린데일리 부국장 mjjo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