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보통신대학교
“어서 오십시오.”
1997년 1월 하순 정보통신부 장관 집무실.
경상현 초대 정보통신부 장관(현 KAIST 겸직교수)가 정통부 장관실로 들어섰다. 강봉균 장관(재경부 장관 역임, 현 민주통합당 국회의원)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경상현 전 장관이 이날 정통부를 방문한 것은 정보통신대학원대학 총장 인사와 관련해서였다. 정통부는 초대 총장에 경상현 장관을 내정해 놓고 있었다.
경상현 전 장관의 경력은 화려했다. 서울대 공대(화학과) 2년을 수료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로드아일랜드 대학을 졸업하고 1966년 MIT 공대에서 공학(원자력)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9년여 미국 벨연구소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해 한국원자력연구소와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전기통신연구소를 거쳐 한국전기통신공사 부사장, 한국전자통신연구소장(현 ETRI), 한국전산원장(현 한국정보사회진흥원) 등을 역임했다. 이어 체신부 차관을 지낸 후 문민정부 초대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발탁돼 IT강국 코리아 건설에 헌신한 주역이었다.
그는 이날 강봉균 장관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보통신대학원은 IT특성화 대학인만큼 총장은 능력 있고 참신한 후진들에게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총장직을 고사했다.
경상현 전 장관을 초대 총장으로 추천한 사람은 양승택 당시 한국전자통신연구원장(ICU 총장, 정통부 장관, 동명대 총장 역임, 현 인터텟스페이스타임컨소시엄 대표)이었다.
이와 관련한 당시 양승택 원장의 회고.
“제가 경상현 전 장관을 총장으로 추천했습니다. 경 전 장관은 정보통신대학원을 IT특성화 대학으로, 그리고 세계적인 대학으로 육성할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1월에 정통부에 들려 후진들에게 길을 터줘야 한다면서 총장직을 고사했어요.”
정통부와 정보통신대학원설립추진위원회는 논의 끝에 초대 총장을 공모하기로 결정했다. 정보통신대학원 총장으로 내정됐던 경상현 전 장관이 고사했으니 차제에 공개 모집을 통해 유능한 석학을 초빙하자는 쪽으로 방침을 수정한 것이다.
신현욱 대학원설립추진단장(부산체신청장, 한국전파진흥협회 부회장 역임)의 말.
“일간신문에 정보통신대학원대학 총장 초빙 광고를 냈습니다. 2월 20일자로 3개 신문에 공모광고를 냈는데 3월 15일까지 서류를 접수키로 했습니다.”
총장 응모자격은 정보통신 분야 기술발전과 업적을 이룩한 석학으로 정보통신대학원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육성 발전시킬 수 있는 교육 경력을 가진 내국인과 외국인 등이었다. 정통부는 내국인만 고집하지 않았다. 능력있는 해외 석학도 모셔온다는 열린 입장이었다.
응모는 본인이 직접 신청하거나 정보통신 분야 국내외 정교수급 2명 이상 추천을 받은 사람으로 정했다.
제출 서류는 이력서와 교육경력이 포함된 주요 업적소개서와 정보통신대학원 발전계획서, 추천서 및 본인 동의서였다.
정통부는 총장 선임을 위해 박성득 정통부 차관(현 한국해킹보안협회 회장)을 위원장으로 총장후보선임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은 정홍식 정통부 정보통신정책실장(정통부 차관 역임, 현 한국통신 이사장)과 양승택 한국전자통신연구원장 등 정보통신 분야의 학계와 산업계, 연구계 인사 등 10인 이내로 구성했다.
초대 총장 공모는 예상외로 난항을 겪었다. 1차 응모기간이 끝난 후 서류를 취합해 보니 3명만 응모했다. 이들 중에서도 정통부가 기대하는 수준의 총장 후보자는 없었다. 더욱이 기대했던 외국 석학은 한 사람도 지원하지 않았다.
정통부는 난감했다. 고심 끝에 공모기간을 3월 말까지로 연장했다. 정통부는 관련 학회와 대학 등에 후보자를 추천해 달라는 협조문을 보냈다.
2차 공모결과도 기대 이하였다. 모두 8명이 지원했다.
그해 4월 15일. 정통부 차관실 옆 회의실.
박성득 위원장 주재로 총장후보선임위원회가 열렸다. 회의가 시작되자 양승택 원장이 발언권을 얻어 의견을 개진했다.
“우선 심사에 들어가기 전에 총장 자격을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IT분야 전문가라는 기준을 정해 놓고 그 기준에 맞춰 총장을 선임해야 합니다. 세계 최고 IT특성화 대학을 이끌 총장이 이 분야에 문외한이어서는 안될 일입니다.”
위원들이 양 원장 주장에 동의했다. 그래서 이런 기준에 맞는 총장을 선임하기 위한 심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 기준에 맞는 후보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회의를 시작한 지 얼마 안돼 박성득 위원장이 양승택 원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양 원장께서는 잠시 제 방에 가서 기다려 주세요.”
“왜 그러십니까.”
“이유는 묻지 말고 잠시만 나가서 기다려 주세요.”
양 원장은 영문도 모른 채 회의장을 나와 차관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양승택 원장의 회고.
“회의도중 느닷없이 저한테 `차관방에 가서 기다려 달라`고 하니까 당황스럽잖아요. 이유를 물어도 대답도 안하고 무조건 자리를 잠시 비워달라고만 했습니다. 별도리가 없어서 차관실로 가서 우두커니 기다리고 있었지요.”
잠시 후 다시 회의실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위원들이 모두 박수를 치며 활짝 웃음을 터트렸다.
“왜들 이러십니까.”
박성득 위원장이 악수를 건네며 말했다.
“초대 총장으로 양 원장을 만장일치로 선임키로 했습니다. 축하합니다.”
박성득 전 차관의 증언.
“양 원장은 대학원 설립을 위해 헌실적으로 뛰어다닌 분입니다. 그런 분이 총장을 맡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양 원장을 총장으로 추천했고 다른 위원들도 다 동의해 그를 총장으로 선임한 것입니다.”
초대 정보통신대학원 총장으로 선임된 양승택 원장의 회고.
“나는 회의실로 오라고 해 들어가 보니 여럿이 박수를 쳤어요.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총장으로 선출된 걸 축하한다는 겁니다. 어쩔 수 없이 한국전자통신연구원장과 총장직을 겸하게 됐어요.”
양승택 초대 총장.
그는 서울공대 졸업를 졸업했으며 해군 장교(중위)로 근무했다. 이어 미국 브루클린공과대학원에서 전기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미국 벨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지난 1981년부터 1986년까지 한국전자통신연구소(현 ETRI)I에서 TDX(全전자 교환기)를 개발했다. 이후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장으로 6년간 근무하며 이동전화 국내 표준인 CDMA 기술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그는 한국통신학회장도 역임했다.
그가 초대 총장으로 선출되자 그동안 신현욱 국장이 맡고 있던 추진단장은 양 총장이 맡게 됐다.
신현욱 단장의 말.
“저는 당시 정보통신관리단(현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수석전문위원을 겸하고 있었습니다. 제 업무는 한시적이었습니다. 양승택 원장이 초대 총장으로 선출되면서 저는 그 업무에서 물러났습니다.”
대학원대학 설립추진단은 앞서 그해 3월 교육부에 정보통신대학원대학설립계획서와 대학헌장을 제출했다. 이 작업은 추진단에서 실무작업을 했다.
설립계획서에는 대학원 설립 목적과 교육 목표, 그리고 특성화 방안, 교육과정, 개설학부 발전방안, 학사관리, 대학운영, 재정, 후생복지, 중소기업협동연구센터, 대학장단기 발전계획 등이 모두 포함됐다.
신현욱 단장의 증언.
“추진단에서 마련한 설립계획서는 자문위원회와 설립추진위원회 심의를 거쳐 확정했습니다. 이 계획서 작업을 하면서 외국과 국내 대학 사례를 참고했습니다. 특히 KAIST를 많이 참고 했어요. 직원들이 밤샘을 밥먹듯이 하면서 계획서를 만들었습니다.”
정통부에서 이 업무를 담당했던 김인식 기술기획과장(한국정보인증 대표 역임)의 기억.
“설립계획서는 실무자가 직접 교육부 대학지원총괄과에 가서 서류를 접수했습니다. 한시가 급한 사안이었습니다.”
이 작업은 설립추진반 기획팀에서 담당했다. 기획팀에는 김기복(ICU 행정처장 역임), 양병우(ICU 행정처장 역임, 현 KAIST 글로벌e러닝센터장), 송민철(ICU 행정처장 역임, 현 KAIST 무선자동차통신사업개발실장), 김태권(ICU 행정처장 역임, 현 KAIST 인공위성센터팀장) 등이 참여해 학교설립 계획과 학칙 내규 등 법제작업을 진행했다. 이들 중 김태곤씨는 가장 늦게 기획팀에 합류했다.
기획팀에서 이 작업을 했던 송민철씨의 기억.
“당시 국내에서는 광주과학기술원과 KDI국제정책대학원 사례를 참고했습니다. 광주과학기술원에는 출장을 가서 자세히 내용을 파악했습니다. 당시 대학원대학 개교 시기를 1998년 3월로 잡고 있었습니다. 시일이 촉박해 날마다 야근을 했고 밤샘도 수시로 했습니다. 이렇게 어렵게 설립한 ICU가 10년 만에 정치논리에 휘말려 통합하게 될 줄을 그 당시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초대 총장으로 양승택 원장이 선임되자 대학원대학 설립은 가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특유의 추진력과 친화력으로 난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