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포커스]대기전력차단장치

같은 종류의 TV·컴퓨터·조명·전자레인지·전기밥솥을 한 개씩 갖고 있는 이웃이 있다고 가정하자. A씨는 조명을 켜둔 채 24시간 집을 비웠지만 다른 전자제품 플러그는 모두 뽑아 놨다. B씨는 플러그는 뽑지 않았지만 가전제품 전원을 모두 끄고 집을 비웠다. A와 B 중 전기를 더 많이 낭비한 사람은 누구일까.

대기전력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플러그를 뽑거나 스위치가 달린 멀티탭을 이용하는 것이지만 실천이 쉽지 않다. 마트에 진열된 멀티탭.
대기전력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플러그를 뽑거나 스위치가 달린 멀티탭을 이용하는 것이지만 실천이 쉽지 않다. 마트에 진열된 멀티탭.

◇`전기흡혈귀` 대기전력=조명을 켜고 집을 비운 A씨가 전기를 더 낭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정답은 정반대다. 24시간 빛과 열을 만들어낸 전구보다 플러그를 뽑지 않은 전자제품이 소모한 전기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플러그를 뽑지 않은 TV와 컴퓨터(본체·모니터·스피커 포함)만으로도 10와트(W) 전구와 비슷한 전력을 소비한다.

전원을 끈 상태에서 전기제품이 소비하는 전력을 대기전력(standby power)이라고 한다. 기기 작동과 관계없이 사용자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소모된다. 전기를 잡아먹는다는 의미에서 전기흡혈귀(power vampire)라고도 불린다.

에너지관리공단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경우 대기전력은 가정 전력소비량의 10%(약 60W)를 차지한다. 일반적으로 거실(TV·비디오·셋톱박스·오디오)에서 26W, 부엌(전자레인지)에서 2.77W, 공부방(컴퓨터·프린터 등)에서 15W의 전력이 낭비된다. 특히 작동상태를 알려주는 디스플레이 장치가 장착된 전자제품이 많을수록 대기전력이 늘어난다.

대기전력을 모두 차단하면 한 가정이 일년에 약 한 달치 전기요금을 절약할 수 있다. 국가적으로는 연간 5000억원을 아낄 수 있다.

◇대기전력, 어떻게 없애나=대기전력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평소 플러그를 뽑아 놓거나 스위치가 달린 멀티탭을 이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기전력 자체를 잘 모르는 시민들이 아직 많고, 인지하고 있더라도 플러그 뽑기 등을 평소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쉽지 않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 중 하나가 전자제품 성능을 개선하는 것이다.

지식경제부와 에너지관리공단은 대기전력 차단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지난 2005년 7월 대기전력 1W 이하 달성 국가 로드맵 `스탠바이 코리아 2010`을 수립·시행했다. 국내에 유통되는 모든 전자제품의 대기전력을 1W 이하로 줄인다는 목표다.

1단계(2005~2007년)에서 자발적으로 1W 정책을 추진하고 2단계(2008~2009년)에서는 의무규제로 이행하기 위한 준비기간을 거쳤다. 3단계(2010년부터)에서 국내 유통되는 모든 전자제품에 대해 대기전력 1W 정책을 의무화했다.

지경부와 에너지관리공단은 정책성과를 검증하기 위해 지난해 한국전기연구원에 용역을 맡겨 전국 109개 가구를 대상으로 대기전력을 실측했다. 가구별 조사 결과 2003년에 비해 가정내 전자제품 한 대당 대기전력은 45% 감소했다. 2003년 기기당 3.66W에서 2011년 2.01W로 줄어들었다.

지경부는 대기전력 기준 1W를 2015년까지 0.5W로 강화하고 24시간 대기상태인 네트워크 제품의 대기전력을 집중 관리할 계획이라고 최근 발표하기도 했다.

올해 모니터·스캐너·식기세척기부터 0.5W 기준을 우선 적용하고 대상을 점차 넓혀간다는 목표다.

◇대기전력차단장치 `전성시대`=전자제품 자체 대기전력을 줄이는 방법은 소비자가 고가 제품을 새로 구입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대기전력차단콘센트 등 관련 장치 설치가 각광받고 있다.

대기전력차단콘센트를 사용하면 플러그를 뽑지 않아도 대기전력이 대폭 줄어든다. 전자제품을 교체하거나 소비자 생활패턴을 바꾸지 않아도 전기절약이 가능하다.

이지세이버·한미일렉트릭 등 국내 업체들이 대기전력차단 기능과 안전성을 갖춘 콘센트를 출시해 보급을 늘려가고 있다.

에너지관리공단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협력해 지난 2010년 전국 3만 가구에 대기전력차단 콘센트를 한 개씩 설치하는 시범보급사업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간 비교적 적은 양의 시범·개별 보급에 머물렀지만 국토해양부가 대기전력차단장치 설치를 의무화 하면서 보급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국토해양부는 지난 2010년 신규 건축물에는 대기전력차단장치를 30% 이상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건축물의 에너지절약설계기준`을 개정 고시했다.

개정 고시에 따르면 공동주택은 거실·침실·주방에 각각 대기전력자동차단 콘센트나 대기전력차단 스위치를 한 개 이상 설치해야 한다. 대기전력을 차단하는 콘센트 수는 전체의 30% 이상이 돼야 한다. 공동주택 외 건축물도 대기전력자동차단 콘센트나 대기전력차단 스위치로 차단하는 콘센트 수가 전체의 30% 이상이 되도록 해야 한다.

앞으로 대기전력차단장치 보급은 더욱 속도를 낼 전망이다. 지경부가 대기전력차단장치 설치비율을 기존 30%에서 50%로 늘릴 계획이라고 최근 발표했기 때문이다.

김영덕 한미일렉트릭 부사장은 “이전까지 사실상 보급이 별로 없었던 대기전력차단장치는 2010년 약 110만개, 지난해 140만개가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며 “올해부터는 상대적으로 효율이 높은 콘센트를 중심으로 보급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기술 진화 눈부신 대기전력차단장치

대기전력차단장치가 진화하고 있다. 대기전력 차단 기능을 개선하고 소비자 친화적으로 디자인한 제품은 물론이고 스마트그리드 시대에 적합한 차세대 기술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안전성을 높이기 위한 규격도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다.

모토모테크원은 최근 대기전력을 100% 차단하는 `세이브PC`를 출시했다. 이 제품은 모니터·본체 플러그를 뽑지 않아도 대기전력이 발생하지 않아 전기낭비를 줄일 수 있다.

세이브PC 1대만으로도 연간 3㎏의 탄소배출 저감이 가능하다는 게 모토모테크원의 설명이다.

이지세이버는 통신 대기전력을 잡는 기술을 개발, 국제표준 시장 선점을 노리고 있다. 통신 대기전력은 스마트그리드 환경을 구축할 때 가전기기 등이 통신을 위해 24시간 대기하면서 소모하는 전력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20년 통신 대기전력이 OECD 국가 평균 가정 소비전력의 25%를 차지할 것으로 분석했다.

전자부품연구원(KETI)이 주도하는 에너지절감시스템 표준안에 이 기술이 포함됐다. 표준안은 지난 2009년 국제전기표준회의(IEC) 신규 국제표준안(NP)으로 채택됐으며 기술시방서(TS) 발행을 앞두고 있다.

한미일렉트릭은 소비자 친화적인 2구 대기전력차단 콘센트를 개발했다.

시중에 나와 있는 기존 대기전력차단 콘센트는 컨트롤러가 절반을 차지해 2구 크기 제품이지만 1구 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한미일렉트릭은 컨트롤러를 윗부분으로 올리는 새로운 디자인을 적용해 2구 모두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소비자가 안심하고 대기전력차단 콘센트를 사용할 수 있도록 규격도 새롭게 만들어진다. 한국화학융합시험연구원(KTR)은 4월 완성을 목표로 대기전력차단콘센트 안전인증규격을 개발하고 있다.

대기전력차단 콘센트는 일반 콘센트와 달리 교류(AC) 부하를 제어하는 회로 등을 사용하지만 같은 안전인증규격을 적용받아 안전성 검증 면에서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KTR는 최근 관련 공청회를 한 차례 진행했으며 이르면 올해 전기용품안전관리법 고시 개정을 완료한다는 계획이다.

◆인터뷰/이은광 한미일렉트릭 사장

“기존 건축물에도 대기전력차단장치 설치를 장려해야 합니다.”

이은광 한미일렉트릭 사장은 정부가 기존 건물에 대기전력차단장치를 설치하는 것을 지원해야 에너지 낭비를 대폭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지난 2010년부터 신축건물에 한해 대기전력차단장치 30% 설치를 의무화했다.

이 사장은 “기존 건물에서 1년 동안 발생하는 대기전력은 7650GWh”라며 “이는 원자력발전소 1기 연평균 발전량과 비슷한 수준이며 결국 대기전력 때문에 원전 1기를 헛돌리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 사장은 “신축건물에서 발생하는 연간 대기전력은 182GWh로 기축건물의 2.38%에 불과한 수준”이라며 “에너지 낭비를 막고 전력수급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기존 건물에 대한 대기전력차단장치 설치가 필수”라고 덧붙였다.

한미일렉트릭은 지난 2008년부터 대기전력차단 콘센트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과부하 제어와 낙뢰방지 기능을 갖춘 `그린콘센트`를 개발해 5년째 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소비자 인식부족 등으로 보급이 더뎠다는 게 이 사장 설명이다. 최근 인식이 어느 정도 개선된 만큼 올해부터 보급이 활성화 될 것으로 기대했다.

정부 지원이 필요한 것은 가격이 비싸 소비자가 구입을 망설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대기전력차단 콘센트 개당 설치가격은 약 4만5000원으로 한 가구당 2~3개씩 설치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9만~13만5000원 비용이 든다. 가구당 월평균 전기요금(3만원)보다 높은 수준이다. 투자비 회수에 2년 이상 걸리기 때문에 소비자가 선뜻 구입하기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이 사장은 “정부나 지자체가 비용을 70~80% 정도 보조 할 필요가 있다”며 “태양광발전이나 발광다이오드(LED) 보급을 확대하는 것 보다 대기전력차단이 에너지절약에 더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이 사장은 “집에서 수도꼭지가 새면 눈으로 보이고 소리도 들리기 때문에 금방 조치를 취하지만 대기전력은 인지 자체가 어려워 대응하기 쉽지 않다”며 “스스로 대기전력을 차단하는 장치 보급을 확대해 `똑똑한 전기사용`이 이뤄진다면 우리나라 에너지 수급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선일기자 ys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