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머징 이슈]소리의 진화

1993년. 영화사(史)에 길이 남을 명작 `쥬라기 공원` 촬영을 시작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고민이 있었다. 쥬라기 공원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혁신적인 영상 그래픽을 보여주고자 했던 그의 고민은 `소리가 영상을 따라올 수 있을까`라는 것.

[이머징 이슈]소리의 진화

당시 음향 기술 트렌드는 파일 용량을 최소화하는 `압축`이었다. 압축 기술로 콘텐츠 데이터 용량을 줄이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져 현실과 같은 생생한 소리를 영화에서 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스필버그 감독은 화려한 영상에 걸맞게 공룡의 발짝 소리, 물결 떨리는 소리까지 생생하게 재현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발견한 것이 `디지털극장시스템(DTS)`이다.

그는 아일랜드 과학자 테리 비어드가 1990년 만든 작은 음향기술연구소에 불과했던 DTS에 과감하게 투자했다. 디지털 서라운드 음향 시스템의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다. 쥬라기 공원을 시작으로 오늘날 할리우드 영화와 사운드 트랙 대부분에는 DTS 멀티 채널 디지털 음향 기술이 있다.

같은 해 미국 거대 항공기 제조사인 휴스 에어크래프트 내부에 있던 한 연구소가 전문기업으로 분사했다. 휴스는 영화 `에비에이터`에서 다뤄진 전설적인 비행가이자 기업가, 영화 연출가이자 바람둥이였던 하워드 휴스가 만든 회사다.

휴스에서 분사한 연구소 명칭은 `SRS랩스(Sound-Retrieval System Labs)`다. 항공기 엔진이나 프로펠러 등에서 발생하는 극심한 소음 속에서도 조종사, 조종사와 지상 간 육성 의사소통을 명확히 할 수 있는 음향 기술을 개발하는 한 연구 부서였다. 분사를 주도해 SRS랩스를 창립한 탐 위엔 회장은 기술자나 영화 제작자 등 관련 업계에서 `소리의 장인`으로 불린다.

돌비사와 함께 음향 솔루션을 주름잡는 기업인 DTS와 SRS랩스 탄생 이야기다.

이들보다 업계 선배 격인 돌비는 1965년 물리학 박사 레이 돌비가 자신의 이름을 딴 `돌비 연구소`를 세우면서 시작됐다. 당시 사용되던 잡음을 제거하는 기술은 원음의 극심한 왜곡을 유발했는데 돌비 박사는 이듬해 `돌비A 타입(Dolby A-Type)`이라는 이름의 잡음 억제 기술을 발표했다. 소리를 여러 대역으로 분리해 불필요한 잡음만 효과적으로 제거하고 원음의 손상을 방지하는 획기적인 기술이었다.

그 후 `소니 워크맨`에 탑재되며 범용화에 성공한 `돌비B 타입`과 1975년 발표한 극장용 입체 음향 기술 `돌비 스테레오`, 1982년 나온 가정용 기술인 `돌비 서라운드`까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기술을 줄줄이 내놓으며 업계 최강자로 자리매김했다. 1990년대 들어 아날로그 시대가 저물고 디지털 음원이 주목을 받자 1992년 돌비의 명성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입체 음향 코덱(Codec) `돌비 AC-3`를 내놨다. 지금도 극장이나 DVD 감상 시 흔히 접하게 되는 `돌비 디지털`로 불리는 기술이다.

이들로 인해 각종기기에서 재현된 소리는 진일보했다. 영화 콘텐츠와 TV 등 가전기기에는 돌비와 SRS랩스, DTS 기술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이미 길게는 10여년 전부터, 영화를 볼 때 좌에서 우로 이동하는 자동차 모습을 영상뿐만 아니라 소리로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3개 기업 사운드 솔루션이 탑재된 기기 수는 80억대를 훌쩍 넘어선다.

최근 발표된 기술은 또 다른 진화를 예고한다. 우선 SRS랩스의 `MDA(Multi-Dimensional Audio) 플랫폼`을 살펴보자. SRS랩스가 지난달 1.0 버전 개발을 완료했다고 발표한 이 기술은 `채널 기반` 음향 기술 패러다임을 깼다. 여기서 채널이란 소리가 생성, 청취자에게 전달되는 경로다. 5.1채널(6개의 경로로 만들어져 6개의 스피커로 전해짐)·7.1채널 등 용어가 흔하게 쓰인다.

김정택 SRS랩스 한국지사장은 “MDA는 5.1이나 7.1 등 평면 2D 스피커에 맞춘 구성이 아닌 길이와 높이, 폭을 포함한 다차원 공간 소리를 재현하는 것”이라며 “다양한 재생 환경이나 기기에서도 진정한 3차원 서라운드 음향을 즐길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채널 기반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여러 채널이 아닌 두 개의 스테레오 채널이나, 아니면 12개 채널로 구성된 11.1채널, 또는 그 이상 채널 수를 가진 시스템에서도 구현이 가능하다.

소프트웨어 기술로 어떤 환경에서도 마치 그 장면 속에 있는 것 같은 음향을 느끼게 하는 이 기술을 이미 할리우드에서는 주목하고 있다.

앨런 크래머 SRS랩스 최고기술책임자(CTO)는 “할리우드 영화 제작사와 음악 프로덕션까지 다양한 업계에서 MDA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MDA는 SRS랩스에서 개발했던 가장 멋진 기술”이라고 말했다. MDA 기술을 적용하기 위한 생성툴과 재생기는 2분기 내로 이뤄지게 된다. 이르면 올해 여름 크랭크인되는 영화에선 새로운 3D 입체 음향을 만나볼 수 있게 될 예정이다.

기존 채널 방식 음향 기술 발전도 결코 늦지 않다. 특히 스마트폰 침투에는 속도가 붙고 있다.

돌비가 한국지사에서 지난달 중순 공개한 `돌비 디지털 플러스`는 단지 두 개 채널을 가진 모바일용 이어세트에서도 5.1·7.1 채널과 같은 소리 구현이 가능하도록 했다. 가상 서라운드 시스템이다. 소프트웨어 기술로 소리를 6~8개까지 분리해 마치 영화관의 실제 서라운드 시스템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김재현 돌비코리아 지사장은 “모바일기기 소형·경량화 경쟁으로 스피커 유닛에 제한이 생기고 원가 절감 변수도 소리 질을 떨어Em리는 요인인데 이를 소프트웨어 차원 가상 서라운드 기술로 극복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소리 크기가 각기 다른 여러 종류 음원도 음량을 균등하게 조절해 편리한 감상이 가능한 자동 음량 조절기능 역시 돌비 디지털 플러스 기술의 특징이다.

다채널 음향 기술에서 돌비와 강력한 경쟁자로 빠르게 부상한 DTS 역시 모바일 사업 분야를 강화하고 있다. DTS가 발표한 모바일용 서라운드 사운드 시스템 `울트라 모바일`은 `엔벨로(Envelo)`와 `부스트(Boost)`라는 기술로 구성된다. 엔벨로는 돌비 디지털 플러스와 마찬가지로 가상 서라운드 효과를 만들어내는 기술. 부스트는 음향 출력 최대치가 제한된 모바일기기 스피커 대부분에서 `소리 깨짐` 현상 없이 더 크게 감상이 가능하도록 고안됐다. DTS 관계자는 “마치 온 몸을 휘감는 듯한 입체 음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한 번 올라간 소득 수준은 쉽게 후퇴하지 않는다는 `톱니 효과`는 소리에도 정확하게 적용될 듯싶다. 각종 기술로 점철된 양질의 음향에 익숙해진 인류가 예전의 음향을 들으면 단지 아련한 추억이 생각날 수는 있어도 특별히 귀가 즐거울 리는 없다. 그래서 소리도 계속 진화할 것이다.

채널 기반의 패러다임을 깨고 모바일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는 입체 음향 기술 진화의 다음 방향은 어디일까.

황태호기자 thhw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