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 PCB편-4회]PCB 후방산업 체력 키워야

# 한(漢) 고조 유방은 항우에 승리해 천하를 차지한 후 논공행상을 진행했다. 그는 단 한 번도 전장에 나서지 않은 소하를 일등 공신에 책봉해 여러 공신들의 반발을 샀다. 대장군으로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한신과 책사로서 필승 전략을 짠 장량에 비해 후방에서 병참을 담당한 소하의 공은 너무나 작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방은 공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소하를 일등공신 반열에 올렸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후방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인정한 셈이다. 후방이 든든하지 않으면 우선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렵고, 이기는 전략을 구상하는데 변수도 너무 많아진다.

국내 인쇄회로기판(PCB) 제조업체들이 스마트폰·스마트패드를 기반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취약한 후방 산업 때문에 항상 불안하다.

상당수 PCB 소재·장비는 국산화가 진행됐지만, 여전히 대다수 후방 업체들은 영세한 규모로 근근이 사업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소재·장비 후방 협력사들은 품질 관리에 취약하고 노후한 설비로 제품 불량률도 높은 실정이다. 인력 이동이 빈번해 숙련 노동자 양성도 미흡한 편이다. 재무 여력이 취약한 탓에 늘 부도 위험에 노출돼 있기도 하다. 후방이 무너지면 전방에서 활약하는 국내 PCB 기업들도 위험해질 수 있다. 국내 PCB 산업이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후방 산업 육성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전자회로산업협회(KPCA)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PCB 원자재 시장 규모는 전년 대비 10% 증가한 1조6300억원이며, 생산량은 전년 대비 10% 증가한 1조1090만㎡를 기록했다. 두산전자·이녹스 등 동박적층판(CCL) 제조업체들이 원자재 국산화에 성공해 수입 소재를 대체한 덕분이다.

그러나 원자재 산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취약한 구조가 여실히 드러난다. 일부 대기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내 업체들은 중국산 제품에 밀려 설 자리마저 잃어가고 있다.

PCB 설비 시장 상황도 녹록하지 않다. 지난해 국내 PCB 설비 시장은 제조업체들의 공격적 투자 덕분에 전년 대비 30% 성장한 6200억원에 육박했다. 그러나 올 들어 PCB 업체들이 보수적인 투자로 선회하면서 장비 수주량이 급감하고 있다. 투자 위축으로 올해 PCB 설비 시장 규모는 4000억원 수준에 내려갈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 국내 PCB 약품 시장도 지난해 수준인 4700억원 규모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영세 기업들이 대부분인 전문가공 시장은 지난해보다 7% 성장한 1조6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관측된다. 김운호 한화증권 애널리스트는 “국내 PCB 산업이 안정적인 성장을 이어가려면 원자재·약품 등 후방 산업에서 탄탄한 중견기업이 많이 나와야 한다”면서 “지금 같은 불안한 후방 구조로는 PCB 업체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계속 승리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국내 PCB 후방 업체들의 경쟁력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진행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대다수 PCB 후방 업체들은 국내 특정 고객사 거래에 너무 의존하는 사례가 많다. 전문가들은 적극적으로 해외 시장을 개척해 위험을 분산하고,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또 설비 자동화로 제조 원가를 낮추고, 레진·필러 등 원천소재를 국산화해 원가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충고한다.

시장 트렌드를 읽고 미리 대응한다면 고부가 시장 진출에도 성공할 수 있다. 최근 스마트 기기 두께 경쟁이 심화되면서 슬림형 PCB 수요가 증가하고 있어 초박형 PCB 소재를 제조할 수 있는 설비가 중요해지고 있다. 환경 규제가 강화되는 추세여서 친환경적인 설비 제작은 물론, 내구성이 높은 제품도 관심을 끌고 있다.

PCB 동박 장비 기업 피엔티 김준섭 사장은 “세계적인 세트 업체와 PCB 제조 기업이 국내에 있다는 것은 후방 업체들에게 큰 행운이다”면서 “세트 및 PCB 제조업체와 협력해 신제품 개발부터 양산까지 일괄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한다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원자재 신뢰성 및 인증을 지원하는 시스템 구축도 필요하다. 대기업들은 자체 인증 시스템이 체계화돼 있어 제품 신뢰성이 높지만, 중소기업은 미흡한 수준이다.

PCB 업계에서 UL·ISO9001·ISO14001·TL9000·TS16949·OHSAS18001 등 6가지 인증은 제품 신뢰성 확보 차원에서 굉장히 중요하지만, 많은 중소 업체들에게는 문턱이 높다. 전정열 고영테크놀로지 연구소장은 “신규 거래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제품의 신뢰성 수준을 높이는 게 절실하지만, 대다수 중소 업체들이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면서 “정부나 업계 차원에서 공동 인증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형수기자 goldlion2@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