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100개를 판다고 이야기해 놓고 왜 120개를 팔았느냐. 처음 계획을 세울 때부터 잘못된 것이 아니었는가.”
더 많이 팔아오면 좋아해야 할 CEO가 도리어 호통을 친다. 구본준 부회장이 온 이후로 바뀐 LG전자 모습이다. 바로 이 점이 LG전자의 수익 경영을 뒷받침한다. 애널리스트들도 놀라게 한 깜짝 실적을 내놓을 수 있었던 핵심 비결 중 하나다. 1분기 실적 호조를 이끈 LCD TV를 비롯해 주요 가전은 과거 대비 갑절 이상 영업이익률을 달성했다.
특히 TV 부문이 기록한 역대 최고 영업이익률은 3DTV 품질 혁신과 함께 HE사업본부가 최근 몇년간 강력하게 추진해 온 SCM 혁신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정확해진 수요 예측과 제품 적기 출하, 재고 최적화가 비용 절감으로 이어져 글로벌 판매가 늘어날수록 수익을 개선시켰다.
서로 약속한 만큼 판매하고 생산하는 문화와 시스템으로써 공급망관리(SCM) 혁신 활동이 핵심이다. LG전자가 혹독한 훈련을 거쳐 지난해 정착시킨 구본준식 체질 개선 작업의 일환이다. 당장의 이익을 포기할지언정 뿌리 자체를 바꾸고자 했던 CEO의 일성은 전 사업본부의 일하는 방식을 바꿔놓기 시작했다.
재고와 적자 늪에 빠진 LG전자에 필요한 것은 SCM 개선이라 확신한 구 부회장은 삼성전자에 뒤처진 결정적 이유가 품질도 기술도 아닌 SCM 역량이라고 판단했다. 구 부회장의 강력한 지원에 힘입은 혁신 활동은 여기저기에서 속도가 나기 시작했다.
◇더 팔아도 야단? 바뀐 경영진=구 부회장을 비롯한 C레벨 경영진 태도와 말이 바뀐 것은 최근이다. “더 팔아도 야단, 덜 팔아도 야단입니다.” LG전자 관계자들은 바뀐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더 좋은 실적을 내는 사람이 아니라 계획을 잘 지키는 사람이 칭찬 받는다. 판매 법인에 재고가 다 떨어졌다고 보고받은 고위 임원이 `계획한 대로 다 팔았으니 잘했다`고 끝낸 일화도 유명하다. 예전 같으면 판매 법인에 물건이 다 떨어지도록 왜 공급을 못했냐고 생산 쪽을 다그쳤을 임원이 같은 상황을 칭찬으로 마무리 했다.
계획한 정량을 정시에 생산하고 정확한 시기에 빠르게 납품해 재고를 줄이는 체질 변화 전략이었다. “한계 적자 모델은 팔지 마라”는 구 부회장 지시처럼 크게 적자가 날 모델은 판매도 생산도 안했다.
경영진은 바뀌기 시작했다. 악성 장기 재고를 놀랄 만큼 줄인 한 사업부장은 새벽 6시마다 세계 법인에 직접 전화를 돌려 신제품 발표 시기와 재고 등을 챙겼다. 문제가 있으면 직접 해결을 지시했다.
지난해 각 사업본부 SCM 슈퍼 A TDR(Tear Down Redesign) 활동 범위와 목표는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SCM 개선을 위한 △실판매 정보 기반 수요관리 강화 △공급 신뢰성 제고 △판매운영계획(S&OP) 강화 등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실판매 정보 입수해 주마다 새롭게 계획=LG전자가 최근 가장 강력하게 추진한 것은 판매부터 생산, 구매까지 바꿔놓은 유통정보 중심 수요관리 정책이다. 생산된 제품을 파는 방안을 고민하는 대신 유통 정보를 최대한 활용해 생산에 반영하기로 한 것이 과거와 다르다.
매일 공장 가동 계획으로 이어지는 매주 S&OP 회의 자료를 `실판매량` 데이터로 바꿨다. 과거에는 유통사에 판매한(밀어낸) 판매 대수로 생산 계획을 짰다. 그러다 보니 유통사에 쌓여 팔리지 않는 제품을 공장에선 연속해 찍어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LG전자는 TV 부문 등을 중심으로 2010년부터 실제 매장에서 팔려나간 정보로 생산 계획을 세우고 있다.
수요 변동폭이 큰 LCD TV와 PC 등을 판매하는 홈엔터테인먼트(HE) 사업본부는 이미 60% 이상 거래선 판매 정보를 시스템으로 연계해 자동 입수한다. 매장 단위로 유통 정보를 받는 곳도 4개 고객이 넘는다. 신뢰성 있는 실수요 정보를 확보하면서 상호 판매계획공급예측(CPFR) 프로그램으로 유통업체와 협업해 수요 및 공급계획 변동을 최소화했다.
고투마켓(GTM) 전략에 따라 마케팅 전략을 공급망 전략과 결합했다. 과거엔 SCM 조직이 유통 정보를 확보하고 수요 예측량을 입력했지만 영업이 직접 팔릴 예측량을 입력하고 `정확도`를 인사고과에 반영하기도 한다.
수요예측량을 입력하고 생산 계획, 자재 조달 계획까지 확정하는 실 판매 수량 기반 주 단위 S&OP체계를 보다 안정화시켰다.
변화한 LG전자는 정확한 계획을 세우는 역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이를 위한 시스템도 별도 개발해 유통사 통합 물류 창고가 아닌 실제 매장 단위로 유통 정보를 관리하는 수준까지 진전됐다. 수천개 매장별로 과다 재고와 부족 여부를 판별해 낸다.
밀어내기가 없어지고 유통 재고도 줄었다. 이미 일부 해외 지역에서 삼성전자 SCM 역량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일 생산 당일 출하`…3일 확정체제 안착=`당일 생산, 당일 출하 전략`은 LG전자 TV 등의 재고를 줄일 수 있었던 주요 비결이다. 그날 생산한 물량은 그날 출하하는 것을 원칙으로 정한 것이다.
적시 생산이 이뤄질 수 있는 자재 수급을 위해 3일치 계획은 변동하지 않았다. 4일째 되는 날 변동을 하더라도 일주일치 변동할 수 있는 분량은 정해졌다. 이는 급격한 변동으로 자재 공급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협력업체를 배려한 것이기도 하다.
구 부회장 취임 이전부터 노력해 왔던 일이지만 정착이 쉽지 않았다. 고착화가 이뤄진 것은 지난해 들어서다. 적자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에서도 문제 개선의 끈을 놓지 않은 것이다.
LG전자 관계자는 “초기에는 생산성이 오히려 떨어졌고 반발도 심했지만 이를 극복하면서 생산성이 눈에 띄게 올라갔다”면서 “2000년대 초반엔 자재 조달 여부를 몰라 단 하루도 생산 분량 확정을 못했었다”고 말했다. 3일만 고정시켜 놓고 계획을 움직이지 않으면 생산라인의 모든 문제가 다 보인다는 것이 이들이 깨달은 바다.
가전 공장 등은 협력업체와 자재 수급을 실시간화하고자 창원 공장을 시작으로 실시간 정보 공유를 강화하고 `보틀넥`을 서로 알 수 있도록 했다. 이른바 `생산 동기화 시스템`이다. 협력사에서 생산하는 수량이 LG전자 생산·구매팀 모니터에 실시간으로 깜빡 깜빡 표시된다.
빠른 배송을 위해 물류 혁신도 꾀했다. 중간 단계를 없애고 가능한 한 단순한 경로를 설계, 생산 공장에서 유통 매장 직배송으로 물류비를 줄였다. 수요 예측 정확도와 공급 신뢰도가 높아지면서 선순환 체계를 가져 왔다.
◇워룸은 SCM 문제 해결사=문제에 봉착할 땐 수시로 해결사 조직이 구성된다. `워룸`으로 불리는 이 구성체는 임시 공간에서 주요 의사 결정자가 모여 신속한 해결을 꾀한다. 워룸은 주간 물량 등을 확정하는 S&OP 회의에 앞서 진짜 문제를 해결하는 조직체다.
셋트 제조 업체인 LG전자와 부품 공급사인 LG디스플레이가 하나의 워룸을 꾸리기도 했으며 유통업체, 물류업체 등 다양한 외부 협력업체도 워룸 멤버 대상이다. 이는 `전시 상황실 같은 모습으로 과제에 임해 많은 문제를 개선할 수 있다`는 매킨지 방법론을 흡수한 것으로 LG전자는 SCM 전략 구현에 있어 많은 효과를 봤다.
워룸을 운영할 때는 모든 문제와 상황을 벽에 게시해 참여자 모두가 상시적으로 보고 공유한다. 예를 들어 성수기 물량 급증에 앞서 자재 문제를 도출해 대응 전략을 마련한다. 법인별로 생산량을 늘리거나 제조 방식에 있어서 다양한 부분을 논의한다.
“혁신합시다”를 외치는 `혁신학교` 부활에서 혁신 인재 양성을 비롯해 SCM 전문가 양성 등 다양한 인력 투자도 늘렸다. LG전자 관계자는 “SCM 혁신은 전체 최적화가 이뤄져야 하고 이는 경영층의 강력한 추진 없이는 불가능하다”면서 “CEO가 SCM 철학을 바탕으로 임직원의 혁신 활동을 권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LG전자의 SCM 변화
유효정기자 hjyou@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