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대 초 A기업은 시가총액 5000억원이 넘는 견실한 중견기업이었다. 연 매출 2000억원을 넘기며 팹리스 업계 역대 최고매출 기록을 갈아치웠다. 하지만 10여년이 지난 현재 A기업의 사정은 정반대다. 스마트 기기 시장 대응을 제때 하지 못한데다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주력 고객사에 의해 동종 기업과 `제살 깎아먹기` 가격 경쟁에 돌입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결국 A기업은 연매출 200억원도 채 되지 않는 소기업으로 위상이 급감했다.
국내 팹리스 기업들이 삼성, LG 매출 비중을 줄이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이들 대기업들은 한 번에 큰 매출을 확보할 수 있는 `VIP` 고객이다. 하지만 자체적으로 칩을 개발하며 팹리스 시장을 줄이는 한편, 지속적으로 단가를 깎는 영업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이에 따라 팹리스 기업들은 삼성, LG 매출을 줄이고 해외 매출을 확보하는 것은 필수적인 생존조건이 돼가고 있다.
현재 팹리스 업계에서 삼성, LG를 고객사로 가지지 않은 기업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일부 기업은 이들 고객사 비중 없이도 성장하고 있거나 비중을 크게 가져가지 않도록 유지하고 있어 주목된다. 또 삼성, LG에 집중할 역량을 해외 시장 개척으로 돌려 착실히 결실을 맺고 있다.
넥스트칩(대표 김경수)은 삼성, LG 물량이 아예 없는 유일한 팹리스 기업이다. 이 회사는 마진율이 높은 카메라 이미지신호프로세서(ISP) 매출을 중심으로 차량용 반도체 등 신사업 연구개발(R&D) 투자를 지속적으로 늘리면서 해외 매출을 확보하고 있다. 특히 올해 하반기부터 카메라 ISP와 짝을 이루는 CCD 센서를 본격 양산할 예정어서 올해 카메라 ISP 세계 시장 점유율을 더 높이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사상 최대 매출을 달성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넥스트칩은 3년 연속 코스닥 히든챔피언으로 선정됐다.
넥스트칩 관계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업 분야에서 가격 경쟁으로 매출을 확보하는 비즈니스는 오래갈 수 없다”며 “CCTV, 자동차 등에 들어가는 카메라 모듈 시장은 공급자 파워를 인정하면서 기술력으로 승부를 볼 수 있어 지속적인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텔레칩스(대표 서민호)는 지난해 180여개 중국 스마트패드 업체에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를 공급한 데 이어 올해는 차량용 멀티미디어 기기로 중국 사업 영역을 확대할 계획이다. 이 회사 역시 삼성, LG 비중을 크게 가져가지 않고도 고속 성장하는 기업 중 하나다. 지난 해 700~800억원의 매출을 기록한 텔레칩스는 올해 연매출 1000억원을 넘길 것으로 전망된다.
일부 팹리스 기업들은 처음부터 삼성, LG를 공략하기보다 중국 시장을 공략, 신뢰를 쌓는 것이 장기적인 기업 성장에 낫다고 판단한다.
팹리스 업계 관계자는 “삼성, LG 물량에 참여했다가 불량이 생기면 중국 구매 담당자들은 아예 쳐다보지 않는다”며 “작은 매출이라도 차근차근 해외 기반부터 다지는 것이 맞다고 본다”고 밝혔다. 이 회사는 중국 및 신흥국에 지사 설립도 검토 중이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팹리스 기업의 성장과 부진은 지속 성장이 가능한 아이템 선정에 달려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며 “특정 아이템만으로 대기업 물량에 주력할 경우 가격 경쟁이 불가피하며 이는 제품개발에 투입할 역량이 줄어드는 악순환을 낳는다”고 전했다.
정미나기자 mina@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