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다니던 길을 벗어나라. 전에 못 본 무언가를 발견할 것이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정신에 따라 1925년에 세워진 벨연구소가 낯설지 않은 것은 한국계인 김종훈 사장 때문이다. 최연소 사장, 최초의 외부인 사장, 최초의 동양인 사장 등의 타이틀을 달고 지난 2005년 입성했다. 그는 IT업계에서 도전 정신의 아이콘이 됐다.
벨연구소. 이름은 익숙하지만 정작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벨연구소가 보유한 특허는 3만3000개, 배출한 노벨상 수상자는 13명이나 된다. 우리는 트랜지스터, 광통신, 휴대폰 기술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 세상에 살지만 그것을 벨연구소에서 만들었다는 사실은 모른다. 이런 기술이 세상에 미처 없던 시절, 벨연구소는 어떻게 이런 위대한 업적을 해낼 수 있었을까. 어떤 천재가 있었길래 이런 혁신이 가능했던 것일까.
저자 존 거트너는 벨연구소의 성공은 한 천재의 힘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성과는 아이디어를 내는 과학자와 그 아이디어를 만드는 엔지니어의 힘이 하나로 합쳐져 만들어낸 것이다. 벨연구소가 위대한 이유는 각기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새로운 것에 대한 열정을 하나로 모아 최대한 역량을 발휘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벨연구소는 이끌었던 머빈 켈리나 존 피어스 같은 관리자들은 과학의 발전은 뛰어난 개개인의 역량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 따르면 일회용 성과가 아닌 지속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개개인을 관리하기 보다 아이디어의 생산 과정을 관리해야 했다. 벨연구소는 개인의 능력이 아닌 아이디어를 관리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 아이디어 관리 시스템이 벨연구소의 지속적인 혁신을 이끄는 밑바탕이 됐다.
요즘 기업은 성과에 따른 성과급을 당연한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많은 성과를 낸 벨연구소는 성과급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성과급을 받으려면 빨리 개발해야 하고, 빠른 개발은 새로운 것을 찾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발전시킬 때 가능하다. 그래서 벨연구소는 돈이 아닌 동기부여를 통해 성과를 창출하려 노력했다.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 때 들어가는 수많은 돈과 노력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벨연구소의 분위기는 그것을 더욱 강화시켰다. 다른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말을 듣는 사람들, 그들이 모여 성과를 만들어낸 곳이 바로 벨연구소다.
이 책은 벨연구소를 대표할 만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벨연구소의 전성기를 열어준 머빈 켈리, 트랜지스터 개발로 노벨상을 수상한 윌리엄 쇼클리와 월터 브래튼과 존 바딘, 정보이론과 비트의 개념을 만든 천재 수학가 클로드 섀넌 등 사람들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벨연구소의 `오늘`을 만든 김종훈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 일이 쉬워서 맡은 것이 아닙니다. 어려우니까 맡은 거죠.” 벨연구소의 세상에 없는 것을 향한 도전은 지금도 계속된다.
존 거트너 지음, 정향 옮김. 살림Biz 펴냄. 가격 2만5000원.
허정윤기자 jyhu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