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이현덕의 정보통신부

CDMA 세계화

가자, 기회의 땅 세계로.

여름 휴가철이 거의 끝날 무렵인 1997년 8월 22일 오후.

서울 김포공항 국제선 제2청사 2층 출국장으로 여행 가방을 든 장년들이 하나 둘 모여 들었다. 이들은 정보통신부가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세계화를 위해 구성한 중남미 시장개척단이었다.

<96>이현덕의 정보통신부

잠시 후 정홍식 정통부 정보통신정책실장(정통부 차관 역임, 현 한국통신사업자협회 이사장)이 모습을 나타냈다. CDMA 정책 총괄책임자인 그는 시장개척단 단장이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정 실장은 앞서 도착한 일행과 반갑게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CDMA 시장개척단 구성은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CDMA 이동통신서비스를 앞세워 기술수입국인 한국이 기술수출국으로 도약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다음은 CDMA를 통해 ICT 외교라는 전형(典型)을 선보였다는 사실이다.

개척단은 범정부 차원에서 산, 연, 관 공동으로 구성했다.

정통부 황의환 부가통신과장(현 한국정보통신공사협회 부회장)과 권병욱 사무관(현 방송통신위원회 편성평가정책 과장), 한국전자통신연구소(현 ETRI) 한기철 연구부장(현 인터넷연구부문 책임연구원)과 정인명 연구실장(현 한국통신사업자협회 방송시험인증단장), 한국통신(현 KT) 윤명상 소장과 홍원표 이사, 김형준 과장, SK텔레콤 마중수 이사(현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과 교수), 신세기통신 이상길 상무와 심창식 과장, 삼성전자 홍순호 이사(현 부사장)와 정재홍 부장, LG정보통신 유은영 이사와 김양훈 부장, 현대전자 장병준 전무와 정영기 부장, 이기승 부장이 개척단원으로 참여했다. 이들 외에 방문국 주재 한국대사관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해외무역관 관계자가 현지에서 개척단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개척단 목적지는 멕시코와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중남미 3개국이었다. 중남미 지역은 CDMA 유망지역으로 시장 규모는 21억달러 수준이었다. 2001년이면 71억달러로 크게 성장할 것으로 정부는 전망했다.

단장인 정홍식 실장의 증언.

“시장개척단은 한국이 CDMA 종주국임을 널리 알리고 이를 통해 정보통신산업 해외진출 전진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범정부 차원에서 구성했습니다. 디지털이동전화 도입이 임박한 신흥시장인 중남미 3개국이 방문국이었습니다. 이들 국가 통신사업에 한국 기업이 진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CDMA 방식의 이동통신기술 첫 상용화는 한국ICT사에 한 획을 긋는 기념비적 쾌거였다. CDMA 상용화까지는 몇 번의 정치적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CDMA 상용화라는 정책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 당시 장관과 실무진, 그리고 연구진은 자리를 걸고 CDMA 상용화라는 미래 희망을 지켰다.

윤동윤 체신부 장관(현 한국IT리더스포럼 회장, 정우회 회장)은 `CDMA 개발에 장관직을 걸겠다`며 CDMA 개발에 총력전을 펼쳤다. 그는 한국전자통신연구소(현 ETRI) 연구원들에게 `CDMA 개발은 전쟁이다`라는 문구를 벽에 써 붙이라고 지시했다.

CDMA 기술 도입의 주역인 경상현 정통부 장관(현 KAIST 겸직교수)은 CDMA 방식을 고집하지 말라는 한승수 청와대 비서실장(국무총리 역임, 현 김앤장 고문)의 제안을 한마디로 딱 잘라 거절했다. 청와대 비서실장의 말은 대통령 뜻이었다. 대통령의 뜻을 거절하는 데는 소신과 철학이 필요했다. 그는 CDMA 기술을 도입한 책임자로서 그런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그는 얼마 후 장관직에서 경질됐다.

경 장관 후임인 이석채 정통부 장관(현 KT 회장)은 갈림길에 선 CDMA 서비스방식을 대통령과 독대해 관철시켰다. 자신의 장관 발탁이 CDMA를 중단하라는 역할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각계의 의견을 수렴해 총대를 메고 대통령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다.

이런 고비를 넘기고 한국은 미국 퀄컴이 개발한 CDMA 기술을 세계 처음 상용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정통부는 CDMA 세계화를 주요 정책으로 추진했다.

시장개척단 구성 1년여 전인 1996년 8월 26일.

강봉균 정통부 장관(재경원 장관, 16·17·18대 국회의원 역임)은 상공회의소 상의클럽에서 9개 해외진출 기간통신사업자 및 통신장비제조업체 대표들과 조찬 간담회를 갖고 통신산업의 해외진출 전략을 논의했다. 간담회에는 데이콤과 한국이동통신, 서울이동통신과 현대전자, LG정보통신, 한화전자정보통신, 동아일렉콤, 삼성전자, 대우통신 대표가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해외진출 애로사항으로 △통신산업의 기술수준, 국제지명도, 자본력의 상대적 열세 △전문인력과 정보력 부족 △통신사업자와 장비제조업체 간의 공조체제 미흡 △국내 업계 간 과당경쟁 등을 지적했다.

강 장관은 이에 대해 “통신산업 해외진출을 강화하기 위해 장관 회담, 통신협력위 회담, 협력각서 교환으로 정부 간 협력체제를 구축하는 한편 정보통신산업에 대한 대외경제협력기금 지원을 확대하고 절차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그해 11월 18일.

정통부는 `정보통신산업 해외진출지원협의회`를 구성했다. CDMA를 비롯한 ICT산업 수출에 본격적인 시동을 건 것이다. 이계철 정통부 차관(현 방송통신위원장)을 위원장으로 재경원과 외무부 등 관련부처 국장급과 한국수출입은행 등 유관기관, 한국통신을 비롯한 통신사업자, 통신장비제조업체, 정보통신 관련 연구기관, 관련협회 책임자 26명으로 위원회를 구성했다. 간사는 정통부 이교용 국제협력관(우정사업본부장 역임, 현 한국우취연합회장)이 맡았다.

협의회는 세계 통신시장 분석과 해외지출 지원방안 수립·시행, 국내 업체 간 과당경쟁 방지와 해외진출 애로사항 해소 등의 업무를 담당키로 했다.

1996년 12월 6일.

강봉균 장관은 이날 오후 한승수 경제부총리 주재로 재경원 회의실에서 열린 제2차 국가경쟁력강화추진위원회에서 `정보통신산업발전 종합대책`을 보고했다. 이 대책은 ICT강국 코리아 구현의 미래 청사진이었다.

정통부는 1995년 8월 4일 정보화촉진기본법이 제정되자 곧바로 정홍식 실장 주도로 추진위원회와 총괄반, 연구개발반, 표준화반, 기반조성반을 구성해 대책안을 만들었다.

정통부는 종합대책에서 CDMA를 비롯한 정보통신분야의 수출품목을 선정해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강 장관의 회고.

“당시 우리 경제에 위기가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수출만이 탈출구였어요. 정보통신산업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새해를 맞은 1997년 1월 14일.

정부는 그해 각 부처에서 추진할 주요 경제정책을 발표했다. 정통부는 주요 정책 중 하나로 정보통신산업 해외진출을 추진을 제시했다. 중국과 중남미, 동구시장 개척을 위한 대외협력기금과 수출보험 확대로 정보통신산업 해외진출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해 3월 25일.

정통부는 한국수출입은행, 수출보험공사,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등 유관기관과 통신사업자, 통신장비제조업체 등의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CDMA 디지털 무선통신산업의 해외진출 지원방안`을 논의했다. 박성득 정통부 차관(현 한국해킹보안협회장)이 주재한 이날 협의에서는 국내 CDMA 무선통신산업, 특히 단말기분야의 해외진출 전망이 매우 밝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하고 CDMA 통신산업의 해외진출을 활성화하기 위한 방안을 협의했다. 정통부는 영문홍보책자 발간과 KOTRA 해외무역관 활용, 해외 유명 학술지에 연구논문 게재, 정보통신 관련 국제행사 등을 통해 국내 CDMA 상용화 현황과 기술발전 수준에 관한 홍보활동을 강화키로 했다. 또 CDMA 진출이 유망한 국가와 정부차원의 국제협력 활동을 강화하고 CDMA 기술 고도화를 위해 220억원을 지원, 이동통신 단말기용 핵심부품 개발을 지원키로 했다.

그해 4월 29일.

정통부는 박성득 차관 주재로 통신사업자와 통신장비제조업체 등의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아시아지역 정보통신시장 진출 지원방안을 협의했다. 참석자들은 국산 교환장비의 조직적인 홍보활동을 위해 종합적인 전전자교환기(TDX) 홍보책자를 발간해 CDMA 홍보책자와 함께 해외에 널리 배포키로 했다.

그해 5월 27일.

정통부는 정보통신산업 해외진출지원협의회(위원장 박성득 정통부 차관)를 열어 중남미시장 진출 지원방안을 논의했다. 이날 정부와 사업자 및 장비제조업체,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해외무역관 등 관련기관의 협조체제를 구축, 국내 업체 간 동반진출을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이런 협의를 거쳐 정통부는 중남미지역에 CDMA 시장개척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박 차관의 말.

“그 무렵 CDMA 수출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했습니다. 범정부 차원에서 협조체제를 구축해 수출을 늘리는 데 총력전을 펼쳤습니다. 저도 중국과 베트남을 방문할 때 통신사업자 대표들과 함께 갔습니다.”

중남미 시장 개척단 구성과 활동 일정 등 실무작업은 권병욱 정통부 국제협력관실 사무관이 담당했다.

권 사무관의 증언.

“개척단 구성과 일정안을 만들었습니다. 홍보물을 만들고 선물로 작은 손가방을 준비했습니다. 국내도 아닌 낯선 외국에서 포럼 장소와 일정을 잡는 일이라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시일이 촉박해 일부 자료는 외무부(현 외교통상부) 협조를 얻어 외교파우치로 보냈습니다.”

그는 그해 6월 `중남미 통신시장의 전망과 한국기업 진출지원방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중남미 시장개척단은 7월 중순경 최종 일정이 확정됐다. 그리고 8월 22일 개척단은 첫 방문국인 멕시코를 향해 출발했다. 김포공항의 하늘은 맑고 높았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