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전자교환기 1000만 개통
전전자교환기 1000만 회선 개통은 11년 만에 다시 든 축배였다.
1997년 11월 6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한국통신(현 KT) 주변은 경비가 삼엄했다. 하루 전부터 비상경계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이날 오전 한국통신 15층 대강당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전전자교환기 1000만 회선 개통 기념식이 예정돼 있었다. 전전자교환기는 우리가 세계 10번째로 개발해 1986년 처음 설치했으며 11년 만에 1000만 회선을 돌파했다. 그런 만큼 의미가 각별했다.
한국통신 입구에는 검색대가 설치됐고 폭발물 처리반과 감지견이 곳곳에 배치됐다. 입장이 허용된 참석자들은 신분증을 제시한 후 비표를 받아 검색대를 통과해 들어갔다. 비표가 없는 사람은 입장이 금지됐다. 대통령 동선에 따라 폭발물 감지견을 대동한 경호요원들이 철저하게 보안검색을 했다. 현직 대통령이 전전자교환기 개통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통신을 방문한 일은 김 대통령이 처음이었다.
오전 9시57분.
김 대통령이 탄 방탄용 검은색 승용차가 경호차량의 안내를 받으며 한국통신 정문 입구에 도착했다. 강봉균 정보통신부 장관(재경부 장관, 16·17·18대 국회의원 역임)이 김 대통령을 수행했다. 김 대통령은 이계철 한국통신 사장(정통부 차관 역임, 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이정욱 한국통신 부사장(사장권한 대행 역임, 현 한국정보통신감리협회장) 등의 영접을 받고 이들과 악수를 나눈 뒤 곧장 행사장인 한국통신 15층 대회의실로 올라갔다.
“대통령께서 입장하십니다.”
오전 10시 사회를 맡은 이광세 한국통신 총무실장(현 KT 동우회장)의 말에 따라 참석자들은 박수로 김 대통령을 맞이했다. 행사장 단상에는 김 대통령을 중심으로 강봉균 정통부 장관과 박구일 국회통신과학위원장(해병대 사령관 역임, 예비역 중장), 이계철 한국통신 사장(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이명박 신한국당 국회의원(서울시장 역임, 현 대통령)과, 키르카츠 공화국 몰도바 카지안 통신 장관이 좌우에 앉았다.
김 대통령은 이날 치사를 통해 “우리 기술로 개발한 전전자 교환기 1000만 회선 개통을 온 국민과 함께 경축한다”며 “이제 우리는 1가구 2전화시대를 열어 정보통신 대중화를 앞당겼고 세계 9위 통신대국으로 발돋움했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이어 “다가오는 21세기는 정보통신기술이 국가경쟁력은 물론 국민 삶의 질을 좌우하는 고도 정보사회가 될 것”이라며 “우리는 2010년까지 전국을 거미줄처럼 이어주는 초고속 정보통신망이 완성되면 공공기관과 기업은 물론 모든 국민이 필요한 정보를 언제 어디서나 신속하게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 대통령은 “정부는 정보통신산업이 세계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각종 지원책을 강구하고 특히 소프트웨어 산업 육성과 전문인력 양성, 창의적인 벤처기업에 대한 지원을 확대해 나가겠다”면서 “여러분이 고도 정화사회 건설의 주역이 돼 우리나라를 세계 제1의 정보통신 선진국으로 만들어 달라”고 당부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전전자교환기 개통에 기여한 개인과 단체에 훈장과 표창장을 수여하고 이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이정욱 한국통신 부사장이 동탑산업훈장을, 강석렬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책임연구원이 산업포장, 조규조 정통부 서기관이 근정포장을 받았다.
대통령 단체표장은 한국통신과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삼성전자, LG정보통신, 대우통신, 한화정보통신이 수상했다. 또 국무총리 표장은 송준갑 한국통신 교환운용국장과 정재진 한국통신 종합기획국장, 이경호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책임연구원, 김정식 대덕전자 대표이사(현 회장), 우승훈 동아텔레콤 연구이사, 김종찬 유양정보통신연구소 부소장, 이현행 단암산업 부설 연구소 부소장이 각각 받았다.
김 대통령은 이에 앞서 이상복 한국통신 네트워크본부장(한국통신공중전화 대표 역임)으로부터 경과보고를 받았다.
이 본부장은 “전자교환기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 정보통신기술 총아로 주목받는 전전자교환기를 우리 기술로 개발해 기간통신망에 공급한지 11년 만에 1000만 회선을 개통하게 됐다”면서 “국산 전전자교환기 개발에 따른 국산대체 효과는 4조5000억원에 달하며 이 교환기술은 우리가 원천기술을 보유해 국민의 자긍심을 높여 주었다”고 보고했다.
이 본부장은 “한국통신은 이번 1000만 회선 개통을 계기로 지금까지 축적된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정보통신기술 자립으로 국가 산업 발전과 세계화에 더욱 정진해 나갈 것을 약속드린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기념식이 끝난 뒤 한국통신 4층 전자실로 이동해 전전자교환기 시설현황을 보고받고 교환시설을 둘러보았다.
김 대통령은 이곳에서 10여분 간 머물면서 국산교환기의 운영현황을 살펴보고 이경준 한국통신 네트워크본부 시설운용실장(KTF 사장, 에이스안테나 사장 역임, 현 KT 동우회 상임 부회장)으로부터 전전자교환기 개발 과정과 성능, 설치 현황 등을 보고 받았다.
이 실장의 증언.
“대통령 행사라서 굉장히 긴장됐습니다. 당시 전자실은 10평 남짓했습니다. 청와대 경호실에서 입구에 금속탐지기를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탐지견을 데리고 들어와 나한테 다시 탐지견 검색을 하는 바람에 혼비백산했습니다. 송아지만한 감지견이 얼마나 무섭던지….”
당시는 지금처럼 파워포인트로 개발과정을 보고하지 않았다. 대형 브리핑 차트를 만들어 내용을 한 장씩 넘기며 보고했다.
김 대통령은 이 실장에게 “수고 많이 했다”고 격려한 뒤 이 실장과 기념촬영을 했다.
이와 관련한 뒷이야기 하나.
당초 한국통신은 김 대통령이 전자실 방문 시 몇 개항의 질문지를 만들어 청와대에 전달했다. 김 대통령이 이중 한두가지라도 질문하면 이 실장이 답변하는 형식으로 사전 준비를 했다. 하지만 막판에 이 계획은 취소했다. 청와대 비서실에서 혹시 김 대통령이 자칫 전전자교환기에 대한 기술적인 내용을 잘못 질문할 경우를 우려해 취소한 것이다.
김 대통령은 재임 중 웃음을 자아내는 말실수를 몇 번 한 적이 있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이름을 잊어버려 회의석상에서 `차씨`라고 했고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했을 때에도 대통령 카리모프를 `카리모스`라고 부른 것이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 관계자의 말.
“김 대통령 동선을 따라 TV카메라가 취재 중인데 만의 하나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김 대통령이 말실수라도 하면 곤란한 일이 아닙니까. 정치나 사회 문제가 아닌 기술 분야는 김 대통령에게 생소한 분야입니다. 그래서 아예 질문을 하지 않고 브리핑만 듣는 것으로 조정한 것입니다.”
김 대통령은 이어 한국통신 1층 청사 입구(현 방송통신위원회 정문 앞)로 이동해 전전자교환기 1000만 회선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했다. 제막식에는 강봉균 장관과 이계철 사장, 박구일 위원장. 이명박 의원 등이 참석했다.
자연석으로 만든 기념비에는 김 대통령이 붓글씨로 쓴 `정보통신 기술자립`이란 문구를 새겼다. 기념비는 넓이 350㎝, 높이 230㎝ 크기로 만들었다.
이상본 네트워크본부장이 제막에 앞서 기념비에 관해 설명했다.
“이 기념비는 정보통신 세계화 도약과 미래 지향적인 국가발전을 위해 대통령께서 친필로 하사하신 것입니다.”
김 대통령은 일행과 제막식을 한 후 곧장 청와대로 떠났다. 대통령 참석 행사를 무사히 끝낸 한국통신측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통신은 이날 세종문화회관에서 1000만 회선 개통 리셉션을 열고 자축했다.
한국통신이 전전자교환기 개통 기념식에 대통령 참석을 청와대 측에 요청한 것은 그 해 8월경이었다.
이 일을 앞장서서 추진한 이정욱 부사장의 회고.
“전전자자교환기 1000만 회선 개통은 그 의미가 대단합니다. 우선 1가구 2전화시대를 열었습니다. 국산대체 효과는 또 얼마나 큽니까. 그래서 이계철 사장의 결심을 받아 정통부를 거쳐 청와대 경제수석실에 가능여부를 타진했습니다. 그런데 예상외로 청와대 경제수석실에서 `한번 추진해 보자`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공정거래위원장 역임, 현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은 이 행사에 적극적이었다. 대통령 참석이 결정되자 기념식 진행을 한국통신이 주관하기로 했다.
식순이나 내용, 진행에 관해 수시로 청와대 측과 협의해 하나씩 결정했다. 기념식 사회와 경과보고, 시설현황 브리핑, 기념비 제막식 등 모든 진행은 한국통신 간부들이 담당했다.
김 대통령의 친필 휘호도 한국통신에서 청와대에 건의하자 청와대는 문안을 만들어 보내라고 했다.
이정욱 부사장의 계속된 증언.
“한국통신 내부 논의를 거쳐 6개 문안을 작성했습니다. 그 중에서 청와대가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내부에서는 `정보통신 기술자립`을 비롯해 `정보통신 기술자립 선진조국 건설` `정보통신 선진조국 건설` `전자교환기 기술자립 정보통신 선진국초석` `전자교환기 기술자립 고도정보사회 창달` `정보통신 기술자립 고도정보사회 초석` 등의 문안을 청와대로 보냈습니다. 이 중 `정보통신 기술자립`을 선택하셨고 대통령께서 몇번이나 휘호를 고쳐 쓰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기념비는 김영삼 정부가 물러나고 한국통신이 경기도 성남으로 본사를 이전하자 성남으로 옮겼다. 김 대통령이 쓴 친필 휘호는 행방불명이다.
이정욱 부사장의 말.
“대통령의 휘호는 역사적인 자료입니다. 그 휘호는 한국통신 회장 방에 걸려 있거나 아니면 전시관에 전시해야 할 휘호인데 행방이 묘연해 안타깝습니다.”
전전자교환기 1000만 회선 개통은 통신혁명의 값진 결과물이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