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5일 오후 3시 30분 놀라운 소식이 전 세계에 전해졌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무역 1조달러를 돌파한 것이다. 광복 직후 1946년 6400만달러에 불과했던 무역액이 65년 만에 무려 1만7000배 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 중 이 같은 성공을 거둔 사례는 유일하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최빈국이 불과 반세기 만에 교역을 바탕으로 세계 중심에 우뚝 선 것이다. 1962년 처음 수출 주도형 경제성장 모델을 세운 뒤 50년 만에 이룬 쾌거다.
한국 전쟁 이후 미국이 우리나라에 막대한 규모의 원조를 단행할 때 서구의 한 칼럼니스트는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을 피우려는 것처럼 쓸모없는 짓이라고 평가절하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쓰레기 더미 같은 폐허 속에서 기적처럼 장미꽃을 피워냈다.
36년간 일제 압제 하에서 치욕의 세월을 보냈고, 광복의 달콤함을 채 만끽하기 전에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온 국토는 폐허가 됐다. 당시 내다 팔 것이라고는 가발·옷가지·수산물밖에 없었다. 이때 국가 경제의 운명을 수출에 거는 성장전략은 `무모한 도박`에 가까웠다. 그러나 꾸준히 기반을 다지며 우리 경제는 한 단계씩 도약했다. 현재 섬유·철강·조선·반도체·자동차 등 분야에서 세계 1, 2위를 다투는 위업을 달성했다. 그러나 아직 샴페인을 터뜨리기에는 너무 이르다. 이제 우리 경제는 무역 2조달러 시대를 열기 위해 속도를 내고 있다.
무역 2조달러를 달성하려면 산적한 문제들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 무엇보다 수출 시장을 다변화해야 한다. 우리 수출시장은 선진국과 중국에 지나치게 편중돼 있다. 유럽 재정위기 사태가 보여주듯 선진국이 기침만 해도 우리 경제는 몸살을 앓는다.
신흥 개발국으로 교역을 더욱 확대해 이런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중동·남미 등 신흥국이 경제 발전을 계기로 교역 시장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아직 미지의 대륙인 아프리카조차 자원을 기반으로 세계 교역 시장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신흥 개발국들은 우리의 성공 노하우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잘 활용한다면 새로운 교역 파트너를 수월하게 확보할 수 있다.
환율에 의존하는 허약한 체질도 바꿔야 한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고품질 및 디자인을 바탕으로 제값을 받기보다는 물량 위주로 수출해왔다. 고부가가치 창출이 가능한 영역을 개척해 양에서 질로 교역의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반도체·선박·자동차·휴대폰 등 우리나라 10대 수출품이 전체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51%)을 넘는다. 새로운 성장 엔진이 될 제품을 찾지 못한다면 무역 2조달러 달성은 어렵다. 선진국을 모방하는 패스트 팔로어 전략을 벗어나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적극 개척하는 퍼스트 무버 전략을 세워야 한다.
내수시장 확대는 가장 시급하게 개선해야 할 과제다. 무역에서 거둔 과실은 대기업에 편중돼 중소기업, 서민들과는 나누지 않으면서 내수는 위축 일로에 있다. 서민경제가 어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고용 없는 성장이 고착화되고 있는 이유다. 우리나라는 무역 1조달러를 넘는 9개 나라 중 중국을 제외하고는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낮다. 물론 무역 1조달러 돌파는 수출지향 전략 덕분이었다. 그러나 내수와 수출의 상대적 격차가 그만큼 확대되는 문제를 키웠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무역 환경은 무역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에 불리해지고 있다. 지금 세계는 전통 수출 주도형 국가뿐 아니라 세계 최대 소비국인 미국까지 앞장서서 수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모든 나라가 경제위기로 망가진 내수 시장을 대체할 수출 시장을 찾고 있는 셈이다.
수출 경쟁력 확보를 위해 세계 각국들이 인위적인 환율 절하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보호 무역주의로 인한 갈등은 점차 깊어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환율 조작국 지정을 놓고 으르렁거리고 있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수출 의존도가 높고 무역수지 흑자가 큰 국가를 향한 경계와 비난의 강도가 세지고 있다. 중국·독일·일본은 물론이고 우리나라도 여기에 해당된다.
내수 기반 강화는 이제 현실적으로 돌아봐야 할 매우 절박한 문제다. 민간소비와 내수회복을 꾀한다면 국민 소득개선 방안을 찾아야만 한다.
2010년 1분기를 정점으로 민간소비가 계속 하락하고 있고, 부채율 증가 속도는 점차 빨라지고 있다. 저축은 2009년 말을 정점으로 또 다시 줄어들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을 면치 못하는 실정이다.
이형수기자 goldlion2@etnews.com
◆ 이운호 지식경제부 무역정책관
대학 졸업 후 관세청에서 첫 공직생활을 시작한 젊은이. 그가 맡은 일은 다달이 무역통계집을 만드는 것이었다. 항만에서 수출되는 돌가루를 보면서, 첨단제품을 수출하는 무역대국 대한민국을 꿈꿨다. 27년 뒤 그는 우리나라 무역을 책임지는 고위 공직자가 됐고, 무역 1조달러 달성이라는 감격을 맛본다.
이운호 지식경제부 무역정책관 이야기다. 그는 사회생활 첫발부터 무역과 인연을 맺었다. 무역 1조달러 돌파 현장 한가운데 그가 서 있었던 것도 필연이었다.
그는 지난해 12월 5일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바로 우리나라가 세계 아홉 번째로 무역 1조달러를 돌파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 3시 국내 조선제조업체가 4억달러가량의 선박을 수출할 때 무역 1조달러 돌파라는 역사적인 순간에 도달했다.
“지난해 6월 무역정책관으로 부임했어요. 업무를 채 파악하기도 전에 무역 1조달러 돌파가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죠.”
사실 지난해 초만 해도 수출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그러나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일본 특수가 발생했고, 무역 1조달러 달성 시점이 앞당겨졌다. 이 때문에 관련 부서들은 행사를 준비하느라 지난 가을 내내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이 정책관은 무역 1조달러 돌파 행사 때 1세대 무역인을 초청한 자리가 가장 인상 깊었다고 말한다. 가발·봉제 등을 만들어 수출했던 1세대 무역인들과 우리나라 첨단 산업 육성에 공헌한 외국인들을 초청해 감사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백발이 성성한 한 노신사는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아낙네들의 머리카락을 수집해 가발을 만들고, 수출하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고 소회를 밝혔다.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이 내수를 중심으로 경제 발전을 시도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처음부터 수출에 주력하는 초강수를 뒀다. 내수 시장만 보고 시작했다면, 철강·반도체·자동차에 결코 투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정책관은 대한민국 무역을 지켜본 산증인으로서 따끔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이제 우리나라가 수출을 지속하면서 내수를 키우는 일에 신경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재정위기 등으로 앞날이 불안하고, 가계 부채가 급증한 탓에 소비를 촉진하는 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출 성장에 비례해 내수를 키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남북관계가 잘 풀려 북한이 우리 경제권에 들어온다면 내수 시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해 우리 경제 구조를 한 단계 도약시키는 것이 수출 성장을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지금처럼 대규모 장치 산업 투자로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설명이다.
“소프트웨어(SW) 등 기술력과 사람의 두뇌를 활용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합니다. 최근 한류 덕분에 높아진 국가 브랜드를 활용해 상품 가치를 높이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아프리카·남미 등 신흥시장을 개척하는 노력도 배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 인구의 20%가 사는 중국 내수 시장을 타깃으로 수출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늘날 우리 경제가 지금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 세계 시장을 적극 개척하는 도전 정신 덕분입니다. 이런 가치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형수기자 goldlion2@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