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충격으로 국민들의 시름이 깊어가던 1998년 6월 15일. 이날 국산 소프트웨어의 간판이자 국민적 자존심이었던 문서작성프로그램 `한글`이 시장에서 영원히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1998년 7월 벤처기업협회와 한글학회 등이 주도해만든 `아래아한글사리기 운동본부`는 신임사장으로 전하진 지오이넷 사장은 선임했다. 이찬진 전사장은 최고기술경영자(CTO)로 역할을 변경했다.](https://img.etnews.com/cms/uploadfiles/afieldfile/2012/09/11/315005_20120911173642_671_0002.jpg)
세계적인 SW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MS)와 한글과컴퓨터(한컴)는 이날 오전 롯데호텔에서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경영난에 시달리던 한컴이 MS로부터 2000만달러 투자 유치 대신 한글 개발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국내 컴퓨터 사용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워드프로세서 시장의 80% 가까이를 차지하는 `한글`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면서 업계와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한글`을 단순한 하나의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한글의 우수성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존재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989년 처음 `한글` 선보여=지난 1989년 이찬진, 김형집, 우원식 세 사람은 서울대학교 동아리에서 만든 국산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 `한글 1.0`을 개발해 공개했다. 당시 국내에서 사용하던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은 초보적인 수준으로 `보석글` 등 외국 프로그램을 한글화한 것이어서 기능상 문제가 많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출시한 `한글`은 사용하기 쉬운 워드프로세서를 향한 유저들의 갈증을 풀어준 프로그램이었다. `한글`은 무엇보다 당시 컴퓨터 기술로는 구현하기 힘들었던 한글, 한자, 수십 국가의 문자를 소프트웨어 하나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또 화면상에 편집된 대로 출력할 수 있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여기에 한자사전, 다단편집, 맞춤법 기능 등도 호평을 얻었다.
1995년 MS의 윈도95가 새로운 운용체계로 등장하면서 `한글`은 윈도용으로 변신했다. 윈도용 `한글`이 자리를 잡은 것은 97 버전이 완성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삼성전자의 훈민정음, 포스데이타의 일사천리 등 다양한 윈도용 워드프로세서 제품이 출시됐지만 `한글`의 아성을 깨뜨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글`은 승승장구하지 못했다.
이찬진 사장 등 한컴 창립멤버들은 불법복제와의 전쟁 탓에 매출규모가 불안정한데다 인터넷서비스업체 HNC넷 설립 등 경영다각화로 위기상황에 빠졌다. 개발 초기부터 암호기법 등으로 복제방지에 나섰지만 출시되자마자 복제 방지장치가 풀려버린 점도 경영악화를 초래했다.
이로 인해 이찬진 사장은 1998년 경영부실을 이유로 `한글` 프로그램 포기를 선언하며 MS에 투항했다. 더 이상 `한글` 개발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찬진 사장은 MS와 2000만달러 투자계약에 사인했다. `한글`이 사라질 위기였다. `한국의 빌 게이츠`라 불리며 승승장구했던 이찬진 사장도 위기에 봉착했다.
이때부터 뜨거운 논란이 시작됐다.
`한글`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과 부실기업은 퇴출돼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당시 IMF 분위기상 외국인 투자유치가 대세인 상황에서 MS 인수는 기정사실화되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한글을 영어에 빼앗길 수 없다”며 국민정서에 호소하기도 했다.
![이민화 벤처기업협회장(당시 한국메디슨 사장)](https://img.etnews.com/cms/uploadfiles/afieldfile/2012/09/13/46-1.jpg)
◇`한글 살리자`는 여론 들불처럼 번져=한컴과 MS 발표가 알려지자 국내 여론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 악화됐다. PC통신은 반대의견으로 도배됐고 이종훈 비트정보기술 사장과 벤처기업협회는 신문광고를 내고 `한글`을 살리자는 내용의 호소문과 성명서를 각각 발표했다.
나우누리, 천리안, 하이텔 등 PC통신은 `한글 살리기 운동` 서명운동을 전개해갔다.
일부 소프트웨어업체는 `한글` 대체상품 개발을 모색했으며, 삼성전자는 `훈민정음`으로 국산 워드의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가운데 정보통신부는 `한글` 살리기는 시장경제원리에 따라 해결될 문제라고 밝혀 또 다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해 문화관광부는 “한글 포기는 한글 표현문제뿐만 아니라 국민의 국어생활에 악영향을 미친다”며 다각적인 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부부처에서도 서로 입장 차를 보인 것이다.
“더 이상 `한글`은 없다”는 계약사항은 불공정거래에 대한 반감까지 불러일으켰다. 400만 `한글` 사용자는 앞으로 MS사의 워드프로세서를 구입하고 사용법을 새로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벤처기업협회가 이 비용을 분석한 결과 1조원에 이르는 국부손실이라는 결론을 내놨다.
당시 MS사는 `한글` 때문에 일본에서 20만원이 넘는 워드프로세서를 한국에서는 거의 공짜로 제공하고 있었다. `한글`이 사라지게 되면 신규 구입비용과 재교육 비용을 합해 1조원가량의 신시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벤처기업협회는 한컴의 `한글` 포기선언 이후 “MS의 불공정 거래는 소비자의 선택을 말살한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오게 된다. 범국민적으로 `한글`을 살려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벤처기업협회의 호소에 힘입어 곧이어 `한글 살리기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됐다. 한글학회 등 15개 단체가 참여해 이후 다양한 사업에 뜻을 모았다.
이민화 벤처기업협회장(당시 한국메디슨 사장)이 `한글` 살리기의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이 회장은 1998년 한컴 지분참여 시 메디슨 직원 반대에도 불구하고 50억원의 종잣돈을 지원해 한컴 회생에 기여했다.
용산전자상가 상점가 조합도 `한글` 살리기 운동에 지지의사를 표명하고 전자상가에서 판매되는 조립PC에 `한글` 정품을 탑재하기로 했다.
국민운동본부의 `한글` 지키기 운동은 외자유치 반대운동이 아니었으며 `한글`의 가치를 대외적으로 알리는 일에 착수했다. `한글` 포기는 한국인의 자존심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며 한컴의 몰락은 국내 소프트웨어산업의 생존에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컴은 결국 국민운동본부와 공동으로 `한글`을 지키기 위한 성명을 발표한다. 이 자리에서 이찬진 사장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는 대신 신임사장을 공개 모집하기로 하는 경영개선계획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한글 살리기서 정품사용 운동으로 승화=국민운동본부는 한컴에 100억원 규모의 투자를 하는 대신 `한글` 포기를 전제로 한 MS사와의 지난 합의를 파기했다. 국민운동본부는 또 1만원 국민주 운동과 100만 회원 모집운동을 펼쳐 나갔다. 100억원 규모로는 `한글` 살리기에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정부와 공공기관이 앞장서 소프트웨어 정품 사용운동을 전개할 것도 제안했다. 국내 소프트웨어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공공부문이 정품사용에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후 국민운동본부는 정부와 공공기관이 정품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예산 1000억원의 추경예산 반영을 요청했다. 최고 경영자도 새롭게 영입했다.
새로 임명된 전하진 사장은 `한글` 소프트 100만 회원 모집운동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한컴은 이 운동을 전개하면서 `한글` 8·15판 제공, 무료 이메일주소 제공, 상용소프트웨어 저가공급 등의 당근책을 제시했다.
`한글` 살리기 운동의 가장 소중한 성과는 불법복제 단속과 정부 및 공공기관의 정품 구매 정책이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소프트웨어산업의 활로는 정품사용에 있다는 벤처기업협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강력한 단속과 정품구매를 지시했다.
정품사용운동과 함께 검찰의 대대적인 불법제품 단속도 이어졌다. 심지어 일부 부처와 기업이 `한글` 정품을 구입해 다시 설치하는 일도 벌어졌다.
한때 부도위기를 겪으면서 핵심사업을 포기할 운명에 처한 한컴이 단시간에 회생의 길로 접어드는 국면이었다.
이민화 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은 “이때부터 한컴, 안철수연구소 등 소프트웨어 기업들의 매출이 급증하고 코스닥 열풍이 힘을 얻게 됐다”며 “`한글` 살리기 운동은 벤처계의 금 모으기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
광주=서인주기자 sij@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