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대 사건_046] 한글 살리기 캠페인 <1998년 7월>

IMF 충격으로 국민들의 시름이 깊어가던 1998년 6월 15일. 이날 국산 소프트웨어의 간판이자 국민적 자존심이었던 문서작성프로그램 `한글`이 시장에서 영원히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1998년 7월 벤처기업협회와 한글학회 등이 주도해만든 `아래아한글사리기 운동본부`는 신임사장으로 전하진 지오이넷 사장은 선임했다. 이찬진 전사장은 최고기술경영자(CTO)로 역할을 변경했다.
1998년 7월 벤처기업협회와 한글학회 등이 주도해만든 `아래아한글사리기 운동본부`는 신임사장으로 전하진 지오이넷 사장은 선임했다. 이찬진 전사장은 최고기술경영자(CTO)로 역할을 변경했다.

세계적인 SW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MS)와 한글과컴퓨터(한컴)는 이날 오전 롯데호텔에서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경영난에 시달리던 한컴이 MS로부터 2000만달러 투자 유치 대신 한글 개발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국내 컴퓨터 사용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워드프로세서 시장의 80% 가까이를 차지하는 `한글`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면서 업계와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한글`을 단순한 하나의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한글의 우수성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존재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989년 처음 `한글` 선보여=지난 1989년 이찬진, 김형집, 우원식 세 사람은 서울대학교 동아리에서 만든 국산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 `한글 1.0`을 개발해 공개했다. 당시 국내에서 사용하던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은 초보적인 수준으로 `보석글` 등 외국 프로그램을 한글화한 것이어서 기능상 문제가 많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출시한 `한글`은 사용하기 쉬운 워드프로세서를 향한 유저들의 갈증을 풀어준 프로그램이었다. `한글`은 무엇보다 당시 컴퓨터 기술로는 구현하기 힘들었던 한글, 한자, 수십 국가의 문자를 소프트웨어 하나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또 화면상에 편집된 대로 출력할 수 있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여기에 한자사전, 다단편집, 맞춤법 기능 등도 호평을 얻었다.

1995년 MS의 윈도95가 새로운 운용체계로 등장하면서 `한글`은 윈도용으로 변신했다. 윈도용 `한글`이 자리를 잡은 것은 97 버전이 완성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삼성전자의 훈민정음, 포스데이타의 일사천리 등 다양한 윈도용 워드프로세서 제품이 출시됐지만 `한글`의 아성을 깨뜨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글`은 승승장구하지 못했다.

이찬진 사장 등 한컴 창립멤버들은 불법복제와의 전쟁 탓에 매출규모가 불안정한데다 인터넷서비스업체 HNC넷 설립 등 경영다각화로 위기상황에 빠졌다. 개발 초기부터 암호기법 등으로 복제방지에 나섰지만 출시되자마자 복제 방지장치가 풀려버린 점도 경영악화를 초래했다.

이로 인해 이찬진 사장은 1998년 경영부실을 이유로 `한글` 프로그램 포기를 선언하며 MS에 투항했다. 더 이상 `한글` 개발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찬진 사장은 MS와 2000만달러 투자계약에 사인했다. `한글`이 사라질 위기였다. `한국의 빌 게이츠`라 불리며 승승장구했던 이찬진 사장도 위기에 봉착했다.

이때부터 뜨거운 논란이 시작됐다.

`한글`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과 부실기업은 퇴출돼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당시 IMF 분위기상 외국인 투자유치가 대세인 상황에서 MS 인수는 기정사실화되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한글을 영어에 빼앗길 수 없다”며 국민정서에 호소하기도 했다.

이민화 벤처기업협회장(당시 한국메디슨 사장)
이민화 벤처기업협회장(당시 한국메디슨 사장)

◇`한글 살리자`는 여론 들불처럼 번져=한컴과 MS 발표가 알려지자 국내 여론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 악화됐다. PC통신은 반대의견으로 도배됐고 이종훈 비트정보기술 사장과 벤처기업협회는 신문광고를 내고 `한글`을 살리자는 내용의 호소문과 성명서를 각각 발표했다.

나우누리, 천리안, 하이텔 등 PC통신은 `한글 살리기 운동` 서명운동을 전개해갔다.

일부 소프트웨어업체는 `한글` 대체상품 개발을 모색했으며, 삼성전자는 `훈민정음`으로 국산 워드의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가운데 정보통신부는 `한글` 살리기는 시장경제원리에 따라 해결될 문제라고 밝혀 또 다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해 문화관광부는 “한글 포기는 한글 표현문제뿐만 아니라 국민의 국어생활에 악영향을 미친다”며 다각적인 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부부처에서도 서로 입장 차를 보인 것이다.

“더 이상 `한글`은 없다”는 계약사항은 불공정거래에 대한 반감까지 불러일으켰다. 400만 `한글` 사용자는 앞으로 MS사의 워드프로세서를 구입하고 사용법을 새로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벤처기업협회가 이 비용을 분석한 결과 1조원에 이르는 국부손실이라는 결론을 내놨다.

당시 MS사는 `한글` 때문에 일본에서 20만원이 넘는 워드프로세서를 한국에서는 거의 공짜로 제공하고 있었다. `한글`이 사라지게 되면 신규 구입비용과 재교육 비용을 합해 1조원가량의 신시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벤처기업협회는 한컴의 `한글` 포기선언 이후 “MS의 불공정 거래는 소비자의 선택을 말살한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오게 된다. 범국민적으로 `한글`을 살려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벤처기업협회의 호소에 힘입어 곧이어 `한글 살리기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됐다. 한글학회 등 15개 단체가 참여해 이후 다양한 사업에 뜻을 모았다.

이민화 벤처기업협회장(당시 한국메디슨 사장)이 `한글` 살리기의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이 회장은 1998년 한컴 지분참여 시 메디슨 직원 반대에도 불구하고 50억원의 종잣돈을 지원해 한컴 회생에 기여했다.

용산전자상가 상점가 조합도 `한글` 살리기 운동에 지지의사를 표명하고 전자상가에서 판매되는 조립PC에 `한글` 정품을 탑재하기로 했다.

국민운동본부의 `한글` 지키기 운동은 외자유치 반대운동이 아니었으며 `한글`의 가치를 대외적으로 알리는 일에 착수했다. `한글` 포기는 한국인의 자존심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며 한컴의 몰락은 국내 소프트웨어산업의 생존에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컴은 결국 국민운동본부와 공동으로 `한글`을 지키기 위한 성명을 발표한다. 이 자리에서 이찬진 사장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는 대신 신임사장을 공개 모집하기로 하는 경영개선계획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한글 살리기서 정품사용 운동으로 승화=국민운동본부는 한컴에 100억원 규모의 투자를 하는 대신 `한글` 포기를 전제로 한 MS사와의 지난 합의를 파기했다. 국민운동본부는 또 1만원 국민주 운동과 100만 회원 모집운동을 펼쳐 나갔다. 100억원 규모로는 `한글` 살리기에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정부와 공공기관이 앞장서 소프트웨어 정품 사용운동을 전개할 것도 제안했다. 국내 소프트웨어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공공부문이 정품사용에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후 국민운동본부는 정부와 공공기관이 정품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예산 1000억원의 추경예산 반영을 요청했다. 최고 경영자도 새롭게 영입했다.

새로 임명된 전하진 사장은 `한글` 소프트 100만 회원 모집운동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한컴은 이 운동을 전개하면서 `한글` 8·15판 제공, 무료 이메일주소 제공, 상용소프트웨어 저가공급 등의 당근책을 제시했다.

`한글` 살리기 운동의 가장 소중한 성과는 불법복제 단속과 정부 및 공공기관의 정품 구매 정책이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소프트웨어산업의 활로는 정품사용에 있다는 벤처기업협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강력한 단속과 정품구매를 지시했다.

정품사용운동과 함께 검찰의 대대적인 불법제품 단속도 이어졌다. 심지어 일부 부처와 기업이 `한글` 정품을 구입해 다시 설치하는 일도 벌어졌다.

한때 부도위기를 겪으면서 핵심사업을 포기할 운명에 처한 한컴이 단시간에 회생의 길로 접어드는 국면이었다.

이민화 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은 “이때부터 한컴, 안철수연구소 등 소프트웨어 기업들의 매출이 급증하고 코스닥 열풍이 힘을 얻게 됐다”며 “`한글` 살리기 운동은 벤처계의 금 모으기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

광주=서인주기자 sij@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