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대 사건_062] 나이스하지 못한 나이스(NEIS) <2002년 9월>

2002년 9월 시작된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관련 논란은 2003년 정점에 달했다. 전국 1만여 초·중·고교에 나뉘어 운영되던 학교종합정보관리시스템을 16개 시도 교육청으로 통합해 온라인으로 연계·관리하기로 하면서 교육인적자원부(이하 교육부)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팽팽한 의견 대립이 1년 넘게 이어졌다.

[100대 사건_062] 나이스하지 못한 나이스(NEIS) <2002년 9월>

구로금천 학부모 모임 회원들이 2003년 4월22일 오후 서울 구로구청에서 학부모 동의 없는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의 도입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구로금천 학부모 모임 회원들이 2003년 4월22일 오후 서울 구로구청에서 학부모 동의 없는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의 도입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100대 사건_062] 나이스하지 못한 나이스(NEIS) <2002년 9월>

전교조는 모든 학사 정보와 학생 기록을 통합·관리하는 것은 학생 및 교사에 대한 인권침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교육부는 인터넷 기반 통합시스템으로 교육행정의 효율화·선진화를 이룰 수 있다고 맞섰다.

◇교육행정 효율화 위해 학교별 시스템 통합 추진=NEIS가 출현하기 전 각 학교에는 클라이언트/서버(C/S) 형태의 학교종합정보관리시스템이 운영되고 있었다. 교육부는 1470억원을 들여 1997년부터 2000년 말까지 학교종합정보관리시스템을 각 학교에 구축했다. 하지만 시스템이 구축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01년 5월 NEIS가 전자정부 11대 중점과제로 선정되면서 내부에서 논란이 불거졌다.

1년도 안 돼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에 전자정부특별위원회 내부에도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인터넷 기반으로 시스템을 재구축함으로써 기대되는 장점도 있었지만 비용 낭비와 정보보안 이슈가 거론됐다.

정부 목표는 `교육행정 선진화·효율화`였다. 학생 전학이나 교사 전근을 비롯해 다양한 학사 정보와 서비스를 학부모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인터넷 기반 인프라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진정한 교육행정 전산화는 정보가 학교 담을 넘어야 한다는 게 정부 측 판단이었다.

신규 시스템 구축에만 500억원이 필요했다. 또 학생·교사의 정보보안을 이유로 기존 C/S시스템과 연계하는 방향으로 구축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2001년 교육정보화 사업의 업무프로세스재설계(BPR)를 맡았던 삼성SDS가 NEIS 구축 주사업자로 선정되면서 논란은 더욱 커졌다. 삼성SDS는 BPR 당시 웹 기반 NEIS 구축을 제안한 바 있다.

하지만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2002년 3월 NEIS 구축에 착수, 그해 11월 27개 영역 중 인사와 예산을 포함한 22개 영역을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이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던 전교조가 문제를 제기하며 NEIS 사태는 새 국면을 맞았다.

◇`교육부 vs 전교조` 갈등 본격화=2002년 9월 NEIS 시범사업이 시작되자 전교조와 시민단체는 본격적으로 문제제기를 시작했다. NEIS가 교원 통제와 학생 및 교사의 프라이버시 침해 가능성이 있다는 게 핵심이었다. 정권이 바뀌는 와중에서도 논란은 커져만 갔다.

2003년 2월 전교조는 인권 침해를 이유로 국가인권위원회에 NEIS를 제소했다. 그 과정에서 교육부는 NEIS에 저장되는 신상정보 입력 항목을 학생 15개, 학부모 15개에서 각각 5개, 2개로 축소했다. 논란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5월 인권위가 전교조의 손을 들어주면서 NEIS를 거부하는 움직임은 더욱 거세졌다. 인권위는 교무·학사, 입·진학, 보건 등 3개 개인정보 영역과 교원 개인정보 27개 항목을 NEIS에서 제외하라는 권고안을 발표했다.

앞서 2003년 3월 전교조는 공인인증서 발급 거부 등 불복종 운동과 연가 투쟁을 벌이며 신상정보 침해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교육부는 교육정보화위원회를 구성해 논의를 진행하려 했지만 전교조의 불참으로 1차 회의는 무산됐다. 이후 연말까지 공개토론, 단식투쟁, 연가투쟁 등이 이어졌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6월 국무총리 산하 교육정보화위원회가 구성됐다. 교육정보화위원회에는 교육부, 전교조, 학계, 사이버보안 등 각계 담당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진행했다. 인터넷 기반 시스템은 좋지만 학생과 교사를 옭아매는 시스템은 절대 용인할 수 없다는 기운이 팽배했다. 무조건 전국 학교로 서버를 설치하고 학생과 학교의 인적사항이 학교 담을 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게 전교조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미 시스템 구축에 500억여원이 투자된 후였다. 전국 학교마다 서버를 설치하려면 수천억원의 비용이 추가로 필요할 뿐더러 효율성도 떨어졌다. 논의는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렸다.

◇국가 정보시스템의 주인은 국민=당시 중재를 맡았던 윤영민 한양대학교 정보사회학과 교수는 “몇 번 회의를 거치면서 논점은 서버 수를 줄이는 쪽으로 옮겨갔다”며 “전교조 의견을 따르자면 3000대 정도의 서버가 필요했는데 당시 구축했던 16대와는 큰 차이가 났다”고 말했다.

3000대의 서버를 몇 대로 줄일지가 관건이었다. 우선 어떤 시스템이든 이를 개·보수하는 데 원래 시스템 구축 때보다 비용이 더 들면 안 된다는 원칙을 세웠다. 또 서버를 전국에 있는 학교에 모두 설치하는 것도 비상식적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학생과 교사를 포함해 100명 미만인 학교도 많았기 때문이다.

공개 소프트웨어(SW)를 사용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예산을 대폭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이를 찬성했다. 결국 오랜 논의 끝에 서버당 가격을 줄이면서 예산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나중엔 800대 안팎으로 서버 수를 줄일 수 있었다. 작은 학교들은 그룹으로 묶기로 했다. 그래도 불만이 있자 지역별 운영위원회를 만들기로 했다. 교사와 시민단체도 참여하고 주기적으로 운영 상황을 위원회에 보고하는 게 핵심이었다.

연말까지 지속된 논의 속에서 교육정보화위원회는 전체 27개 영역 중 24개는 NEIS를 시행하고 나머지 교무·학사, 입·진학, 보건 등 3개 개인정보 영역은 별로 시스템을 설치하는 데 합의했다. 그리고 NEIS는 2004년 전면 시행에 들어갔다.

NEIS 사태는 정보인권에 대한 인식이 사회에 처음 대두됐다는 점, 국내 교육행정의 문제점을 다시 한 번 살펴보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주요한 사건이다. 또 국가 정보시스템을 사용할 때 그 주인은 바로 국민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계기가 됐다.

윤영민 한양대학교 정보사회학과 교수
윤영민 한양대학교 정보사회학과 교수

◆윤영민 한양대학교 정보사회학과 교수

윤영민 교수는 NEIS가 2001년 전자정부 11대 중점과제로 선정됐을 때 `단일창구를 통한 민원업무 혁신(G4C)` 사업과 `개인정보보호` 분야를 담당했다. NEIS에 필요한 정보보호 이슈에 의견을 제시하면서 나이스 사업에 관여하게 됐다.

윤 교수는 “나도 NEIS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학교종합정보관리시스템이 구축된 지 1년도 되지 않아 새 사업을 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낭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윤 교수는 “하지만 인터넷이 급속하게 발전하는 상황에서 학교마다 별도 구축된 클라이언트/서버 시스템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며 “결국 인터넷의 발전과 교사들의 업무 경감, 교육행정 효율화라는 정당성에 밀려 NEIS 추진이 강행됐다”고 회고했다.

윤 교수는 NEIS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던 2003년 교육정보화위원회에서 교육부와 전교조를 중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6개 시도에 NEIS 시스템이 구축된 상태에서 각 학교에서는 기존 클라이언트/서버 시스템이 가동되고 있었다. 몇 번의 회의를 거쳐 윤 교수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기존 시스템 개발비를 넘어서지 않는 한에서 새 시스템을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서버를 줄이는 쪽으로 논쟁의 초점이 이동했다.

윤 교수는 “서버는 800대 안팎으로 줄이기로 합의됐지만 모든 이의 불만을 잠재우기는 힘들었다”며 “그래서 지역별 운영위원회를 두고 주기적으로 운영 상황을 위원회에 보고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시스템 운영 주체는 지역별 호스팅 업체를 선정함으로써 지역 IT사업 발전에도 기여하도록 했다.

윤 교수는 중재는 어느 한 쪽 손만 들어줄 수가 없기 때문에 `원칙이 있는 타협`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적당한 타협이 아니라 미래 지향적인 타협이 필요하며 단순한 기술적 원칙이 아니라 사회적 원칙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윤 교수는 “NEIS 사태는 개인정보보호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이를 제도화하는 과정이었다”며 “사회적 개입으로 거버넌스를 만들고 개인적 이해관계를 위해 시스템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가 만들어진 계기”라고 설명했다. 2002년 NEIS 구축에 투입된 500억원 외에 새로 구축한 시스템에 투자한 500억원은 결국 개인정보보호에 대한 교육비용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아직도 NEIS를 생각하면 씁쓸한 생각이 먼저 든다고 말한다. 당시 대통령이 NEIS를 전자정부 11대 과제에 포함시킨 이유는 교사들의 행정업무 경감이 목적이었다. `행정업무를 줄여 교사를 학생들에게 돌려주자`는 게 캐치프레이즈였다. 하지만 결국 교사들의 업무는 늘었다. 자료 입력을 정보 담당 교사가 아닌 일선 교사들이 담당하게 됐기 때문이다.

윤 교수는 그 원인으로 NEIS 구축 이전에 진행된 교육정보화 BPR를 꼽았다. 기존 업무를 분석하고 불필요한 것은 과감히 없애야 하는데 이런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윤 교수는 “NEIS는 결국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공한 시스템으로 볼 수 없다”며 “시스템만 바꾸는 게 아니라 업무 프로세스 자체를 바꿔야만 진정한 교육시스템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표] NEIS 데이터베이스 신상 정보 축소 항목

[표] 나이스 사태 관련 일지


안호천기자 hca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