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 3월 테헤란밸리(당시 서울벤처밸리)에서는 사무실 구하기 전쟁이 펼쳐졌다. 전년인 1999년까지만 해도 평당 200만원 남짓 했던 임차료는 1년 새 400만원을 훌쩍 넘었다. 이것도 구하기 어려워 불가피하게 테헤란밸리를 떠나는 기업이 나왔다. 벤처기업 N사 대표는 “최근에 세워지는 건물은 24시간 근무할 수 없는데다가 임차료도 비싸다”며 “테헤란로에서 떨어진 외곽지역에 벤처를 위한 새로운 단지를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같은 달 은행에서는 벤처기업행 퇴직 행렬이 이어졌다. 코스닥 상장에 성공하거나 상장을 앞둔 벤처기업이 최고재무책임자(CFO) 영입에 나섰기 때문이다. 전산개발과 기업 심사를 담당한 기술직 직원부터 임원까지 벤처업계로 이동이 이어졌다. 당시 한 은행 관계자는 “올해만 전산인력 4~5명을 포함, 20~30명 직원이 벤처로 옮겼다”며 “지난해를 포함할 경우 그 수가 200여명에 달한다”고 말했다.
닷컴 붐이 한창이었던 2000년 초반 모습이다. 말 그대로 `버블(거품)` 크기가 점점 커지고 있던 상황이다. 벤처 붐이 본격화한 것은 정부가 코스닥시장 부양책을 내놓은 1999년 5월 19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코스닥 시장을 살려 벤처산업을 육성해 보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예상은 기대 이상으로 효과가 컸다. 이날을 기점으로 벤처가 국민 관심사로 떠올랐다. 코스닥 주가가 연일 급등하며 자금난에 빠졌던 벤처기업이 회생의 길로 접어들었다. 물론 주가 폭등으로 수천억원대 자산을 가진 벤처갑부도 탄생했다. `개미`로 불리는 개인투자자는 어느 때에도 누려보지 못한 엄청난 투자 수익을 올렸다. 성인 모두가 코스닥 주가에 관심을 보일 정도로 투자 열풍이 불었다. 이 같은 코스닥 주가 폭등은 바로 벤처붐으로 이어졌다. 직장인·교수·연구원 심지어 학생·공무원까지 벤처 창업에 나섰다. IMF 외환위기 이후 취업난에 시달렸던 대학생은 창업동아리를 결성했다. 대학과 지자체는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창업보육센터를 세웠다. 교수와 직장인 그리고 주부까지 이들 신생 벤처의 `대박`을 기대하고 엔젤 투자에 나섰다.
인큐베이팅도 당시 벤처 붐과 함께 일반화한 단어다. 예비 벤처기업이 설립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업무 공간과 연구실·장비 등 하드웨어는 물론이고 자금·사람·기술·마케팅·경영컨설팅 등 소프트웨어 부분을 지원했다. 당시 벤처 인큐베이팅 관련 업체가 600여개에 육박한 것으로 추정한다. 정부 참여도 활발했다. 사무공간을 제공하면서 일정한 보육기간을 정해서 지원하는 하드웨어 인큐베이팅은 산업자원부·과학기술부·정보통신부·중소기업청이 운영하는 곳이 대학을 중심으로 수백개에 달했다.
여기에 경영컨설팅·마케팅·홍보 등 넓은 의미의 소프트웨어 인큐베이팅업체로 분류되는 업체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단순 경영컨설팅업체부터 벤처기업 홍보와 마케팅 대행사, 온라인 벤처 인큐베이팅업체, 해외 벤처비즈니스 지원업체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창업에서부터 기업공개(IPO)까지 모든 것을 지원하는 원스톱 인큐베이팅업체도 우후죽순으로 출현했을 정도다. 벤처 붐과 함께 기존에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비즈니스가 나타났고 이는 상당한 규모의 일자리 창출로 이어졌다.
벤처투자도 각광을 받았다. 엔젤이 득세하고 벤처캐피털도 확실한 금융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그동안 고수익에 한계를 보였던 벤처캐피털은 연이어 대박을 터뜨리며 두각을 나타냈다. 코스닥 활성화로 투자회수기간이 짧아지고 수익률이 급등한 결과다. 단기간에 높은 수익을 창출하자 벤처캐피털에 투자하고자 하는 민간업체와 기관이 줄을 섰다. 심지어 벤처캐피털 설립에 나서는 기업도 크게 늘었다. 1999년 5월 70여 개사에 머물던 벤처캐피털 수는 2000년 100개를 돌파했고 반년이 지난 후에는 150개를 넘어섰다.
월급쟁이에게 수억원 또는 수십억원을 만질 수 있다는 꿈을 심어 준 `스톡옵션`도 빼 놓을 수 없는 당시 벤처 문화다. 대기업·연구소 우수 인력이 벤처로 나가는 `엑소더스` 현상을 만든 것도 바로 스톡옵션 때문이다. 당연히 대학생 관심사도 바뀌어 취업희망 1순위가 대기업·공기업에서 벤처기업으로 바뀌었다. 결혼 배우자 인기순위에서 벤처기업가가 상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이 여파로 대기업도 잇따라 스톡옵션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물론 문제도 있었다. 스톡옵션을 받은 임직원이 옵션을 행사하게 되면 기업에는 과대비용이 발생했다. 스톡옵션에 따라 전문 인력이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동료애가 사라졌다는 비판도 받았다.
이 같은 벤처 붐은 2000년 3월 미국 나스닥의 인터넷 등 첨단기술주 폭락과 함께 급격히 내리막을 걸었다. 당시 나스닥과는 `무관하다`고 외쳤던 코스닥도 4월부터는 확실한 하락세였다. 상장사는 자본 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됐고 벤처캐피털 등 투자자는 신규 투자에 나서지 않았다. 벤처 붐은 빠르게 식었다. 2000년 코스닥 시장 시가총액은 연초 96조900억원에서 연말 29조150억원으로 마감했다. 2000년 한 해에만 3분의 1 토막이 났다.
이 여파로 창업에 뛰어들었다가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사람이 대거 나타났다. 제대로 된 패자부활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코스닥 투자에 나섰던 개인투자자는 막대한 손실을 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반(反)벤처 정서도 발생했다.
당시 닷컴 붐은 사회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지만 분명 커다란 성과를 얻어냈다. 벤처 창업 전선에 고급인력이 유입되고 여기에 풍부한 자금이 뒷받침되며 NHN·넥슨·다음·휴맥스·주성엔지니어링 등 성공 벤처가 대거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1990년대 중반까지 한 곳을 찾기가 쉽지 않던 `1000억원 매출 기업(벤처 1000억클럽)은 2007년 100개를 돌파했고, 올해는 381개로 늘었다. 10여년 만에 국가 신성장동력으로 자리매김한 셈이다.
어두운 면이 있음에도 벤처버블이 지난 10여년간 우리 경제에 여러 성장동력원을 창출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2000년 벤처붐이 그래왔듯이 2010년부터 일고 있는 스타트업 창업 붐은 앞으로 10여년 우리 먹거리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된다.
김준배기자 joon@etnews.com
◆ 이민화 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 겸 KAIST 초빙교수
“벤처기업협회 설립이 벤처 창업열풍의 계기가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민화 벤처기업협회 명예회장은 “벤처협회 주도로 코스닥 시장이 개설되고 벤처특별법이 제정됐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 회장은 벤처협회 설립을 이끈 인물로,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이 회장은 “벤처 인프라 위에 인터넷 산업 혁명이 결합돼 벤처 창업이 급증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벤처 창업 붐 분위기를 직감할 수 있는 사례도 여럿 소개했다. “1995년 500개도 안 됐던 벤처기업 수는 2000년 1만개를 돌파했습니다. 학생, 교수, 연구원은 물론이고 대기업 임원, 언론인, 공무원 등이 창업에 나섰습니다. 벤처기업가가 1등 신랑감이 되고, 벤처창업 설명회에는 `인산인해`였습니다.”
이 회장은 “세계 최초로 제정된 벤처특별법은 당시 산업자원부와 벤처협회의 합작품으로 초기 벤처 육성을 위한 기틀이 됐다”며 “정치권의 여야 3당이 일치해 최단기간에 법을 통과시킬 정도로 국가 전체의 신산업 육성 의지가 강했다”고 설명했다. 법 통과 후 불어 닥친 1997년 말 IMF 외환위기 극복에 벤처가 큰 원동력이 된 것을 돌아볼 때 벤처 창업 붐은 국가 입장에서는 `커다란 행운`이라고 평했다.
이 회장은 “벤처가 한국 산업의 역사를 바꿨다”는 점도 강조했다. “출범 당시 전무했던 1000억 벤처가 380개를 넘었습니다. 총매출은 75조원에 달합니다. 전체 벤처의 매출액은 200조원이 넘고 국가의 성장과 고용을 동시에 이끄는 유일한 대안이 됐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 IT 격차 발생은 바로 벤처 정책에서 시작했다고 봐야 합니다.”
이 회장은 이어 “벤처에 낭비된 국가 자원은 매우 적다”며 “만약 지금 벤처가 없었다면 한국 경제의 미래 그림이 가능한지 묻고 싶다”고 덧붙였다. 벤처 버블 붕괴 후 장기침체 배경으로 정부의 벤처 규제정책을 꼽았다.
이 회장은 “미국과 달리 과도한 벤처 규제정책으로 추가적인 벤처 성장이 한동안 정체됐다”며 “미국은 자생력으로 회복한 반면에 우리는 세계적인 버블 붕괴를 한국 내 문제로 인식해 `벤처 건전화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성장 잠재력을 축소시켰다. 이는 반드시 반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회장은 언론에 많이 회자된 일명 `벤처 4대 게이트`에 대해 “증권 투기 세력의 문제인데 이를 벤처 문제로 호도한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며 “증권과 사법당국이 벤처 사냥꾼을 막아줬어야 했다”고 꼬집었다.
2000년 전후 닷컴 버블에 대해 “세계적인 인터넷 경제 도래 과정에서 빚어진 일”이라며 “우리나라는 준비된 벤처 정책으로 인터넷 경제 도래 기회를 제대로 맞이해 인터넷 강국으로 부상했다”고 설명했다. 이 회장은 앞으로도 산업 성장과정에서 버블이 나타날 수 있으며 이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 도래 과정에서는 버블이 발생합니다. 이를 회피하면 역사의 뒤안길에 서게 되고, 지나치면 자원의 낭비가 심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닷컴 버블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인 인식이 문제입니다. 이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지금 다가오는 스마트 혁명 대비에 필요한 교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