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는 우리나라 통신 산업에 일대 변혁이 일어난 시기다.
그 신호탄은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 설립이다. 한국전기통신공사의 뿌리는 체신부다. 체신부에서 통신 부문이 갈라져 나와 설립됐다. 1981년 12월 10일 법인등기를 해 이날이 공식 설립일이다.
한국전기통신공사 설립 배경은 극심한 전화 부족 등 당시 시대 상황이다. 1962년 시작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우리나라는 1960·1970년대 고속성장을 구가했다. 이 여파로 1970년대 중반부터 전화 수요가 폭증해 공급이 크게 달렸다. 일각에서는 전화가 투기 대상이 되면서 사회문제로까지 비화됐다.
당시 전화보급률은 10%대를 넘지 못했다. 교환기 등 전화 시설도 노후해 장비 현대화가 시급했다. 전기통신사업을 직접 관장하고 있던 정부는 정부조직인 관계로 이러한 환경 및 기술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체신부 안팎에서는 통신 사업을 공사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널리 자리잡고 있었다.
마침내 정부는 1980년 12월 19일 체신부의 통신사업을 분리해 공사화하기로 확정했다. 이날 체신부가 제출한 `통신사업 경영체제 개선방안`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재가를 얻은 것이다. 대통령 재가가 나자 공사화는 급물살을 탔다. 1981년 3월 14일에는 한국전기통신공사법이 제정돼 공사 설립을 위한 법적 근거도 마련됐다. 이 법은 공사 명칭을 한국전기통신공사로 정했다. 자본금은 2조5000억원이었다. 공사는 체신부에서 통신사업과 관련된 영업·운용보전·관리 및 기타 업무를 이관받았다. 체신부 산하 직할기관 5개와 현업기관(전화국 등) 148개 등 총 153개 기관도 공사로 넘어왔다. 이 기관에 속한 3만5000여명 신분도 공무원에서 국영기업체 직원으로 바뀌었다.
◇민간 기업으로 변화에 대응, 경쟁력 제고=체신부에서 이 작업을 담당한 장차관은 최광수와 오명, 담당 국장은 이해욱이었다. 1981년 3월 5공 정부가 출범하면서 체신부 장관이 된 최광수는 외교관 출신으로 국방부 차관·대통령 비서실장·무임소 장관 등 여러 요직을 섭렵한 우수한 행정가였다. 하지만 기술에는 문외한이었다. 기술을 잘 아는 전문가가 필요했던 최 장관은 당시 청와대 경제과학비서관으로 있던 오명을 체신부 차관으로 불러 한국전기통신공사 설립 등을 맡겼다.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에서 전자공학 박사를 받은 오 차관은 이해욱 국장 등과 함께 거대 조직 체신부를 우정과 통신으로 나누는 작업을 깔끔히 마무리했다.
한국전기통신공사는 1982년 1월 1일 공식적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창립식은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1월 4일 열렸다. 초대 사장은 당시 국회의원으로 대통령 신임이 두터웠던 이우재씨가 맡았다. 한국전기통신공사(1991년부터 한국통신으로 약칭)는 이후 우리나라 통신 발전과 궤를 같이하며 새로운 통신 역사를 써나갔다. 1982년 12월 삐삐로 잘 알려진 무선호출 서비스를 시작했고 1983년 8월에는 국제자동전화를 개시했다. 1984년 3월에는 이동통신 서비스를 위한 별도 회사인 한국이동통신서비스를 만들었다. 이 회사는 10년 뒤인 1994년 선경에 인수돼 SK텔레콤으로 사명을 바꿨다.
◇TDX 상용화·이동통신사업 분화 등 성과=특히 1984년은 한국전기통신공사나 대한민국 통신사에 매우 의미 있는 해다. 전화 보급 확대와 통신 선진화 발판을 마련한 전전자교환기(TDX-1)를 개발해 시범 개통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열 번째로 개발한 TDX-1은 소규모 교환기지만 국내 기술로 개발한 첫 양산 교환기로 전화 보급 확대에 큰 기여를 했다. 실제로 TDX-1 개발 이후 전화 보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1987년 9월 30일 전국 전화 1000만 회선을 돌파, 1가구 1전화 시대를 열었다. 1993년 11월 30일에는 아시아에서 두 번째, 세계 여덟 번째로 전국 전화 2000만 회선을 돌파했다.
이어 1994년 TDX 수출 100만 회선을 기록했고 1995년 8월 무궁화위성 1호를 발사하며 위성시대를 열었다. 1996년 1월 무궁화위성 2호를 발사했고 9월에는 위성이동 데이터서비스를 국내 처음으로 실시했다. 정부 기관과 학술적 목적으로만 사용하던 인터넷이 대중화한 것도 1994년 한국통신이 코넷(KORNET) 망을 구축해 일반인을 상대로 상용 서비스를 시작하면서부터다. 1997년 1월에는 한국통신프리텔을 설립했고, 같은 해 10월 PCS 상용 서비스를 시작했다.
1997년 10월 정부 출자기관으로 전환했고 1998년 12월에는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2001년 12월 사명을 한국통신에서 KT로 바꾸고 CI도 전면 변경했다. 정부 지분을 매각해 2002년 5월 22일에는 완전 민영화했다. 2006년 6월 세계 최초로 와이브로 상용서비스를 시작했고 2009년 6월 자회사인 KTF와 합병해 통합법인 KT를 출범시켰다. 2009년 1월 14일 10대 대표 이사로 이석채 사장(3월 회장으로 승진)이 취임했고 7월에는 새로운 경영방침인 `올레 KT(olleh KT)`를 발표했다. c했다. 2011년 말 현재 KT는 45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매출 22조원(2011년)에 3만1900여명의 직원을 둔 거대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했다.
방은주기자 ejbang@etnews.com
◆ 이해욱 제2 대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 사장
“체신부에서 통신 업무를 분리해 한국전기통신공사를 만든 것은 지금 생각해도 잘한 결정이었습니다. 전기통신공사 업무는 민간 영역입니다. 그런데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설립되기 이전에는 전화 설치를 공무원이 했습니다. 효율성이 낮았습니다. 기계식 교환기에서 전자식 교환기로 이전해야 하는 기술 변화도 한국전기통신공사 설립을 재촉했습니다. 새로운 첨단 장비와 기술을 도입하려면 고급 기술자를 불러와 높은 보수를 줘야 하는데 체신부는 정부조직이어서 이것이 불가능했습니다. 통신 발전을 위해 정책과 사업을 분리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있었고요.”
이해욱 전 한국전기통신공사(KT) 사장은 우리나라의 대표 통신 1세대다. 서울대 상대를 나와 1964년 행시 1회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체신부 우정국장과 초대 통신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차관(1987.7~1988.12)으로 일했다.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설립된 1981년 말 우정국장으로 있으면서 한국전기통신공사 설립을 진두지휘했다. 차관으로 있을 때는 전화기 1000만대 및 데이터통신 단말기 100만대 보급 운동을 펼쳤다.
이 전 차관은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설립될 당시만 해도 전화가 너무 귀해 은행에서 추첨해 나눠줬을 정도”라면서 “개인이 서로 사고팔 수 있었는데 워낙 모자라 웃돈이 붙어 거래됐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전화가 암표처럼 투기 대상으로 변해 사회문제가 되자 당시 정부는 개인 간 전화 거래를 금지한 `청색 전화 제도`를 시행하기도 했다.
체신부 내에서 한국전기통신공사 설립을 모두 찬성한 건 아니었다. 일부는 신분이 안정된 공무원에서 떠나야 한다는 점에서, 또 일부는 업무를 떼어내는 것 자체가 싫어 공사 설립을 반대했다. 이 전 차관은 “근 7만명이나 되는 인원 중 절반을 떼어내 공사로 보냈는데도 큰 잡음이 없어 지금 생각해도 뿌듯하다”면서 “장차관을 비롯해 체신부 직원 모두가 통신 발전을 위해 한마음으로 협력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밝혔다.
그는 1980년대 초 국산화한 전자교환기가 통신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자산업 발전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교환기를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바꿀 때 기술 국산화와 수출을 중요시했습니다. 전자교환기에 반도체가 많이 들어가는데 전자 교환기를 공급하는 외국회사들에 기술 이전을 조건으로 달았죠. 이때 삼성전자도 전자 기술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LG정보통신·삼성전자·대우통신 등이 양산한 국산 전자교환기는 세계 시장으로 팔려나가며 통신장비 수입국이었던 한국을 수출국 반열에 올려놨습니다. 러시아·루마니아·베트남 등이 추진한 통신망 현대화 사업에서도 국산 전자교환기가 큰 역할을 했고요.”
그 자신도 국산 전자교환기 수출을 위해 방글라데시·수단·리비아·동유럽 등을 종횡무진 돌아다녔다. 차관에서 물러난 그는 3년 넘게(1989.12.~1993.3) 2대 한국전기통신공사 사장을 맡았다. 한국통신 사장으로 있으면서 연구소가 하나도 없던 한국통신에 6~7개 연구소를 세우는 한편 우수한 통신 인력을 국내외에서 대거 영입했다. 현재 KT 기업고객 부문을 총괄하고 있는 이상훈 사장도 그 중 한 명이다.
2000년 말 한화정보통신 회장을 끝으로 기업에서 완전히 물러난 그는 세계 192개국을 여행하고 느낀 감상을 모아 2011년 9월 `세계는 한 권의 책`이란 여행서적을 출간했다. “체신부 차관으로 있으면서 외국에 전자교환기를 팔러 다닌 것이 은퇴 후 해외 여행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는 그는 “아프리카 등을 여행하면서 우리가 IT 강국이란 것을 새삼 실감했다”고 밝혔다.
방은주기자 ejb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