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대 사건_045] 컴퓨터 유통업계 연쇄 부도 <1997년>

성장을 거듭하던 한국 컴퓨터 업계는 1997년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1997년 1월 29일 한국 IPC 부도를 시작으로 아프로만, 세양정보통신, 멀티그램, 선인산업, 큐닉스컴퓨터 등 대형 컴퓨터 업계 회사가 줄줄이 부도를 선언했다.

[100대 사건_045] 컴퓨터 유통업계 연쇄 부도 <1997년>

당시 화제를 모았던 세진컴퓨터랜드 광고.
당시 화제를 모았던 세진컴퓨터랜드 광고.

컴퓨터 업계가 기억하는 1997년은 부도로 시작해 부도로 끝난 최악의 한 해다. 1000개가 넘는 중소업체가 함께 쓰러져 5000억원이 넘는 피해를 봤다. 1997년 3월 29일 문을 연 서초동 국제전자센터도 컴퓨터 업계 연쇄 도산 여파로 입주업체를 채우지 못한 채 개장 1년을 보냈다.

이 당시 대우통신이 경영권을 완전히 인수한 세진컴퓨터랜드의 컴퓨터 판매량도 전년보다 20% 주는 등 중견 업체 대부분은 판매 부진과 부도 여파에 시달렸다. 여기에 IMF 외환위기도 겹쳐 업계는 이중고를 겪었다.

컴퓨터 업계 연쇄 도산에 세진컴퓨터랜드도 예외가 아니었다. 2000년 최종 부도 처리된 세진컴퓨터랜드는 납품업체와 다방면의 관계자들이 거미줄처럼 엮여 있던 만큼, 사회 문제로 까지 비화했다.

◇한국IPC=싱가포르에 본사를 두고 있는 IPC의 한국지사 한국IPC는 1989년 회사 창립 후 신용카드 단말기 프린터 공급업체로 업계의 주목을 받으며 성장한 기업이다.

1996년 데스크톱 PC시장에 진출하면서 `마이지니`와 `헬리우스`란 PC 제품을 선보이며 시장 공략에 나섰다. 그러나 제품에서 `윈도95`의 구동이 불안한 것으로 드러났다. 영업이 타격을 받으며 제품 판매부진이 가져 온 경영위기를 막기 위한 시도를 단행했다. 이때 시행한 제품 덤핑 처분과 가격 파괴 전략 미봉책은 회사 전체를 흔들었다. 불안한 재무구조에도 사세확장을 위해 유통망을 증설한 한국IPC는 결국 1997년 1월 29일 부도 처리됐다. 회사는 1500억원 이상의 부도액을 시장에 안겼다. 어음 지급 보증을 해준 PC 유통사 `멀티그램`까지 도산하며 시장에 큰 여파를 미쳤다.

◇아프로만=당시 용산전자상가의 대표 중견 컴퓨터 유통업체 아프로만은 1997년 2월 12일 최종 부도 처리됐다. 최종 어음 29억원을 막지 못한 것이 결정타였다.

아프로만의 부도는 끝없는 사업 확장이 화근이었다. 경기 불황으로 인한 자금 경색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전국 유통망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무너졌다. PC와 주변기기를 정상 유통라인으로 판매하지 않고 덤핑으로 처리하면서 현금을 확보하고 알맹이 없는 매출액만 늘렸다.

부도 위기를 감지한 이후에도 회사는 세진컴퓨터랜드의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에 맞서 같은 상권에 점포를 잇달아 개설했다. 부도설을 무마하기 위해 무리한 광고비까지 지출하며 회사는 부도의 벼랑 끝에 섰다. 결국 아프로만은 500여 납품관련 업체에 1000억원 이상의 부도액을 안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세양정보통신=1997년 2월 13일 세양정보통신은 13억원의 어음을 결제하지 못하며 도산했다. 회사의 부도는 아프로만의 부실채권 340억원을 떠안은 것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세양정보통신은 미국 `다이아몬드`사의 컴퓨터 부품과 주변기기 총판으로 국내 시장에서 주로 CD롬과 멀티미디어카드를 수입해 판매했다. 회사가 부도나기 하루 전 도산한 아프로만에 집중적으로 부품을 납품한 업체다.

회사는 거래처를 다양하게 갖추지 못한 채 아프로만의 주요 부품업체로 사업을 키우다 결국 운명을 함께했다. 세양정보통신은 컴퓨터 업계에 1000억원의 부도액을 남겼다.

◇선인산업=1997년 11월 14일 선인산업이 부도로 쓰러졌다. 용산전자상가 내 선인상가를 운영한 선인산업은 당시 적극적으로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파장은 일파만파로 퍼졌다.

회사는 계열사인 서울제강의 연대 보증을 서면서 재정적 어려움을 예고하고 있었다. 결국 회사는 부도 처리됐고 총부채 1218억원, 순부채 585억원에 달했다.

선인산업의 부도로 선인상가에 입주한 중소 컴퓨터 관련 상인들은 불안에 떨었다. 선인상가를 담보로 한 금융권의 채권으로 상가 입점 업체에 대한 보상은 거의 없을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다. 상가가 경매 처분되면 일반주거지역과 달리 거주 전세권이 우선되지 않아 기존 상권이 송두리째 날아갈 우려마저 있었다. 이에 선인상가 입주상인들은 사업 유지를 위해 선인산업 주주 부채를 떠안으며 정상화 노력에 박차를 가했다.

◇큐닉스컴퓨터=1981년 설립된 큐닉스컴퓨터는 1997년 12월 10일 부도를 맞았다. 프린터, PC 및 CAD를 주력제품으로 경기불황에도 불구하고 중견 컴퓨터업체로 입지를 다져왔지만 내수 부진에 결국 좌초했다.

회사는 1990년대 초까지 PC 및 프린터사업 판매 호황으로 연평균 100%의 고속성장을 유지했다. 큐닉스컴퓨터는 금융 업무를 담당하는 `큐닉스파이낸스`를 비롯해 한국마이크로소프트 총판업무를 담당한 `큐닉스정보기술` 등 계열사를 확장해 갔다. 이 과정에서 회사는 자금압박에 시달렸고 신사옥을 마련하며 회사 재정 위기를 가중시켰다.

큐닉스컴퓨터의 부도는 계열사 큐닉스파이낸스가 IMF로 부도 위기에 처해 있는 금융사로부터 130억원의 단기자금을 쓴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결국 모기업인 큐닉스컴퓨터에 직격탄을 가해 회사 운영자금 부족으로 부도의 운명을 맞았다.

컴퓨터 업계 전체를 한 해 동안 부도 공포로 몰고 갔던 업계 연쇄 부도는 시장을 대기업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했다. IMF로 어려움을 겪은 것은 대기업도 마찬가지였지만 국내 브랜드 PC 인기의 토대를 마련하는 밑거름이 됐다.

당시 LG는 IBM과 제휴로 기술 신뢰도 및 유통망을 쌓으며 컴퓨터 매출이 30% 이상 성장했다. 삼성도 월 평균 5만대 이상 PC를 판매하며 국내 시장 1위를 달성했다. 삼보, 대우 등 대형 컴퓨터 브랜드도 10% 이상 매출을 신장하며 성장 발판을 다졌다.

컴퓨터 업계 연쇄 부도 이후 컴퓨터 유통업체가 주도하는 사업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유통업체가 비즈니스 중심에 위치하고 중소제조업체가 협력하는 사업 모델이 재평가를 받은 것이다. 이후 컴퓨터 업계에는 유사한 업체 간 협력 사례가 생겨났다.

[표] 1997년 컴퓨터업계 주요 업체 도산 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