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대 사건_027] TFT LCD 국산화 <1992년 4월>

1992년 4월, 대한민국을 디스플레이 강국으로 만드는 데 도화선이 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1970년대부터 LCD를 개발한 일본을 뛰어넘겠다는 의지로 `박막트랜지스터(TFT) 액정디스플레이(LCD)`를 국산화한 것이다. 당시 LCD는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각광받고 있었지만 일본이 완전히 시장을 장악한 때였다. 소형 LCD를 일본이 개발해 상용화를 하던 시점이었다. 지난 1980년대부터 공들여온 TFT LCD 국산화 노력은 1992년 4월 삼성전자가 10.4인치 컬러 LCD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결실을 얻는다. 삼성전자는 컬러 LCD 시제품을 자체 기술로 개발하는 데 성공하며 LCD 시장에 첫발을 내디딘다.

삼성전자가 1995년 2월 9일 국내 최초로 TFT-LCD 양산 라인을 가동했다.
삼성전자가 1995년 2월 9일 국내 최초로 TFT-LCD 양산 라인을 가동했다.

◇1980년대부터 공들인 성과=LCD 국산화의 첫 위업이 달성되기까지 보이지 않은 곳에서 많은 노력이 있었다. 국산화를 위한 경주는 10년 전인 198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 이병철 회장은 일본 NEC의 조언을 듣고 LCD 시장 진출에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브라운관을 생산하던 삼성전관(현 삼성SDI)에 LCD 개발을 지시한다. 1982년 삼성전관의 TFT LCD 연구조직은 이렇게 탄생한다. 개발에 어느 정도 진전을 보이던 삼성전관은 1990년 2월 TFT LCD를 시생산할 수 있는 라인 건설에도 나선다. 이후 계열사 간 업무조정을 논의한 결과 LCD 사업은 삼성전자로 이관된다. 바로 TFT, 즉 반도체 때문이었다. 디스플레이 사업을 하고 있었던 삼성전관과 반도체 사업을 하고 있었던 삼성전자 중 누가 LCD 사업을 해야 시너지가 클 것인지 논란 끝에 결론은 반도체 강자가 LCD 사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91년 1월 삼성전자로 TFT LCD 사업이 넘어간 뒤 삼성전관의 연구진 60여명도 함께 적을 옮긴다. 그 당시 삼성전자에 옮겨 LCD 사업을 본격화한 이들이 장원기 현 삼성전자 중국 사장 등이다.

1990년대 착수한 LCD 시생산 라인은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1991년 8월 유리기판 크기 300×300㎜ TFT LCD 라인을 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사이 생산에 필요한 여러 기술을 확보했다. 그리고 1992년 일본과 견줄 수 있을 만한 10.4인치 컬러 LCD 국산화에 성공했다. 본격적인 사업화는 1995년이다. 삼성전자는 3000억원을 투입해 1995년 2월 10.4인치 양산라인을 국내 최초로 가동했다.

◇LG, 디스플레이 양강 시대를 열다=LG가 TFT LCD 개발을 시작한 것도 1980년대다. LG 즉 당시 금성사는 1987년 중앙연구소에서 TFT LCD 개발에 착수한다. 기술 개발 성과를 내면서 LG는 1990년대 초부터 LCD 사업 진출을 모색했다. 최단 시일 내에 세계 선두 LCD 업체로 부상한다는 목표를 수립하고 1995년 9월 1일 구미공장에 TFT LCD 공장을 준공했다. LG는 이 공장에서 같은 해 3월 개발한 노트북PC용 9.5인치 TFT LCD 패널 월 4만개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1995년 10월부터는 10.4인치 VGA급 패널도 생산, 양산 능력을 월 10만개로 확장했다.

◇패널 크기 주도전을 이끌다=1995년부터 TFT LCD 양산에 나선 삼성과 LG가 일본을 따라잡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6년. 1970년대에 LCD 사업을 시작했던 일본과 20년의 기술격차를 뛰어넘은 것이다.

이후 한국은 LCD의 대형화 추세를 가장 먼저 읽고 발 빠르게 나선다. 결정이 내려지면 누구보다 과감하게 투자를 진행해 패널 크기 주도권을 손에 쥐었다. 1995년 2월 가동한 삼성전자는 새 공장 용지를 조성해 생산라인 증설에 나선다. LG는 1996년 4월에 1600억원을 투자해 공장을 준공하고 노트북 PC용 LCD 전 품목 생산체제를 갖췄다. 이어 LG는 1996년 11월 당시로는 세계 최대인 14.1인치 TFT LCD를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데 성공하고 화면을 대형화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두 회사의 세계 신기록 행진은 이어진다. 삼성·LG 등 한국 패널 업체는 지난 2001년 LCD 패널 출하량에서 종주국인 일본을 능가했다. 이후 LCD 시장은 또 한 번의 변화를 맞는다. 중소형 제품 위주였던 LCD 시장이 2006년부터 TV에 본격 채택되기 시작한 것이다. LCD TV를 처음 선보인 곳 역시 일본(세이코 엡슨)이었으나, 시장에서는 한국이 기선을 잡았다.

2000년에는 일본도 넘지 못했던 LCD 기술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40인치 LCD 개발 성공이다. 당시로서는 30인치 이상 LCD는 이론적으로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런 주장을 완전히 깨고 40인치 LCD 개발에 성공하면서 LCD 시장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한국이 TV 시장을 주도하면서 일본과 점점 격차를 벌려간 것도 당연했다. 당시 40인치 LCD 개발을 주도했던 석준형 전 삼성전자 부사장(현 한양대학교 특임교수)은 디스플레이 최고 상인 브라운 상을 국내 최초로 수상하는 영광도 누렸다.

송준호 삼성전자 마스터(기술임원)
송준호 삼성전자 마스터(기술임원)

◆ 송준호 삼성전자 연구원(현 마스터)

“첫째로는 반도체 성공을 거울삼아 과감한 투자로 패널 크기 표준화를 주도한 것, 둘째는 국가 차원에서 디스플레이 관련 산학에 전략적으로 지원한 것, 셋째는 국내 양대 디스플레이 업체의 치열한 기술 경쟁을 바탕으로 한 상호 성장이 지금의 디스플레이 강국을 만들었습니다.”

송준호 삼성전자 마스터(기술임원)는 LCD 국산화의 영광을 만들었던 멤버이면서 지금까지 삼성전자의 차세대 디스플레이 개발을 이끌어온 인물이다. 평범한 엔지니어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20년 이상을 TFT LCD 분야에 종사해 특히 TFT 패널의 설계 공정 관련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LCD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LCD 공정 기술이 그의 손을 거쳐갔다. LCD 국산화 개가를 이룬 당시에는 비정질실리콘(a-Si) TFT의 PA(Process Architecture) 임무를 맡았다. TFT 소자 특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배선불량이나 화소불량 등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주 임무였다.

송 마스터의 아이디어와 기술은 삼성은 물론이고 외국 업체에까지도 널리 적용되고 있다. LCD 생산과정에서 공정 순서 개선, 트랜지스터 집적화 기술 등은 그의 손끝에서 나온 기술들이다.

그는 지난 20여년 디스플레이 산업을 뒤돌아보며 한국이 디스플레이 선두로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이를 밑천으로 한다면 다른 산업도 주도권 경쟁에서 충분히 승산이 있어 보인다.

“그룹 차원에서 LCD 프로젝트는 수종사업으로 지정돼 전략적 지원을 받았다”고 회고한 송 마스터는 “상당한 자긍심을 느꼈다”고 강조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원하는 목표만큼 성과가 즉시에 나타나지 않아 초조감이 커져 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보고, 읽고, 배우는 열정으로 난관을 극복했다. 당시 매일 같은 야근에 아이들 잠자는 모습만 보다 보니 키 크기를 가로 길이로 표현하곤 했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송 마스터가 가장 감동적으로 기억하는 순간은 1995년 가동 초기 370×470㎜ 유리기판에서 생산할 수 있는 최대 크기인 22인치 TV를 개발했을 때다. 초대형 크기인 22인치가 과연 구동될 것인지 걱정이 컸다. 무엇보다 3개월 남짓밖에 남지 않은 삼성 기술상에 출품해야 한다는 빠듯한 시간이 부담이었다. TFT 소자, 액정 공정, 구동소자, 광기구 설계 및 부품 등 모든 것을 한 번에 실수 없이 성공시켜야 했다. 더욱이 20인치 이상 패널에 대응할 수 있는 대형 액정 주입장치를 신규 구축해야 했다. 참여 멤버 모두가 한 치의 오차 없이 제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 철야 작업을 진행하기도 다반사였지만 한 번에 제대로 완성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22인치 TFT LCD가 눈앞에서 선명하게 켜졌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해 삼성 기술상 금상을 받게 되는 영광과 함께 세계 시장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는 계기도 됐다.

그는 후배들에게 한 분야에서 경력 쌓기를 권한다. 송 마스터는 “한 분야에서 지속적인 공부를 바탕으로 지식의 폭을 넓혔을 때 개인적으로나 회사, 국가적으로도 큰 경쟁력을 가지게 된다”면서 “자신 있는 분야를 선택해 연구개발에 매진한다면 최고 전문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보경기자 okm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