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대 사건_075] 코스피지수 2000 돌파, 주식시장 대호황 <2007년 7월>

국내 증권 역사상 2007년 7월 24일은 새로운 장을 연 날로 기록됐다.

종합주가지수인 코스피지수가 장중 2005.2포인트(P)를 찍으면서 지수 2000시대를 열었다. 2005년 2월 사상 네 번째로 1000을 넘어선 이후 2년 5개월 만에 꿈의 2000 고지를 밟았다.

2007년 7월 25일 코스피 지수가 종가기준으로 사상 처음 2000 포인트를 돌파했다. 서울 여의도 증권선물거래소에서 거래소 직원들이 2000포인트 돌파를 축하하며 환호하고 있다.
2007년 7월 25일 코스피 지수가 종가기준으로 사상 처음 2000 포인트를 돌파했다. 서울 여의도 증권선물거래소에서 거래소 직원들이 2000포인트 돌파를 축하하며 환호하고 있다.

다음날인 25일, 코스피지수는 2004.22로 종가기준으로도 2000을 넘었다.

2006년을 1434.46으로 마쳤던 코스피지수는 이듬해 급등세를 연출하며 7개월 만에 500P 넘게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코스피지수는 같은 해 4월 1500 돌파를 시작으로 1600(5월 11일), 1700(5월 31일), 1800(6월 18일), 1900(7월 12일) 장벽을 연이어 무너뜨리며 2000선에 도달했다.

◇1980년 100으로 출발=지난 1980년 100으로 출발한 코스피가 2000을 찍은 데는 꼬박 27년이 소요됐다. 1989년 1000포인트를 찍은 후 2000까지 걸린 시간은 18년이다.

지수의 기준시점인 1980년 출발 이래 93까지 떨어졌던 코스피는 해외증권 발행 등 주식시장이 제 모습을 갖춘 1985년 말에도 150대에 불과했다.

코스피가 상승세를 탄 것은 서울올림픽을 앞둔 시점이었다. 1987년 초부터 강한 상승세를 탄 코스피는 1989년 3월 31일 처음으로 1000을 넘어선다.

저금리·저유가·저달러 3저 호황을 바탕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난 경상수지 흑자가 주식시장에 불을 댕긴 재료로 작용했다.

하지만 그것은 과열이었다. 장바구니를 든 주부들이 객장에 몰리고, 시골에서도 논 팔고 소 팔아 주식에 쏟아붓는 웃지 못할 상황들이 연출됐다. 증시는 힘없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깡통계좌`가 양산되고 주식으로 전 재산을 탕진해 자살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정부는 추락하는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해 발권력까지 동원하는 비상수단(12·12조치)까지 내놓았다. 6개 시중은행에 대해 자금 2조7000억원을 3개 투신사에 대출해주고 투신사로 하여금 그 자금으로 주식을 사게 했다. 주식매입에도 불구하고 주가가 하락했고 결국 주식매입자금으로 3개 투신사에 대출해준 자금은 이후 투신사를 자본잠식으로 몰고 가는 암적인 요인이 됐다.

오히려 시장만 왜곡시켰다. 1994년 9월 16일, 1999년 7월 7일 두 번이나 또다시 1000을 넘어섰다. 그러나 10년 가까이 그 지루한 박스권 장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환란 와중이었던 1997년 12월엔 280까지 무너지기도 했다.

1999~2000년 `바이 코리아` 열풍과 벤처 바람을 타고 주가는 다시 한 번 대세상승을 시도했지만 역시 2000년 1월 4일 1059.04를 정점으로 속절없이 추락해 같은 해 12월 22일 500.60까지 밀리며 말 그대로 `반 토막`이 났다.

코스피가 2000을 향한 대세상승 길에 접어든 것은 2003년 3월부터. 저금리와 점진적 경기회복에 힘입어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주가는 2005년 7월 28일 다시 1000을 돌파했다. 2007년 들어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그해 4월 9일 1500을 넘어선 뒤 거침없이 행진하며 대망의 2000 고지를 밟았다.

◇증시 2000시대 힘은 펀드=2007년 2000시대 진입과 함께 증시의 덩치 역시 놀랄 만큼 커졌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6월 16일 62조원에 불과했던 한국 주식시장 시가총액은 2007년 7월 25일 1090조원으로 17배나 불어났다.

상장종목 수는 1998년 말 1079개에서 1721개로 59.5% 늘었다. 코스피지수 2000선 도달에는 주식형 펀드의 힘이 컸다.

주식형펀드는 2004년 말 8조5000억원 안팎에 그쳤던 주식형 펀드 규모는 2005년부터 급속히 증가했다. 한 해에만 20조원 안팎의 자금을 끌어들였다. 2007년 주식형펀드에 투입된 자금만도 무려 24조원에 달했다. 주식형펀드는 적립식 투자를 기반으로 안정적이면서도 위험 분산 효과를 얻어 시중 유동자금의 물꼬를 증시로 끌어들이는 핵심역할을 했다. 단순히 개인투자자들의 자금을 `기관화`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투자문화를 만들어 은행 적금만 고집하던 자금 흐름 자체를 증시로 돌린 셈이다. 이렇게 유입된 자금은 장기투자문화와 한국 경제 및 증시의 굳건한 성장세에 대한 믿음으로 시황에 따라 들쭉날쭉하는 일 없이 꾸준한 매수 여력을 발휘했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0년 IT 거품 붕괴, 2003년 카드대란은 기업의 투명성을 높이고, 체질을 개선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주식시장에는 `보약`이 된 셈이다.

안정적인 수익을 올리지 못하는 기업은 주식시장에서 퇴출될 수밖에 없었고, 지속적인 수익을 창출하고 향후 성장성이 기대되는 기업만이 평가받게 됐다. 경기 변화에 취약하던 국내 기업들의 이익구조가 안정세를 보였고, 기관과 연기금 등의 자금 유입으로 수급이 개선된 점도 증시 2000시대를 연 요인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한국증시=하지만 높은 기대감에도 불구하고 2000시대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해 9월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면서 주식시장은 또다시 위축됐다.

신용등급이 낮은 저소득층에게 주택자금을 빌려주는 미국 비우량주택담보대출이 집값이 폭락하면서 이자부담은 커지고 저소득층이 원금을 제대로 갚지 못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2007년 4월 미국 2위 모기지 대출회사인 뉴센추리 파이낸셜이 파산신청을 냈고 8월에는 10위권인 홈 모기지 인베스트먼트(AHMI)가 파산신청을 내면서 서브프라임 연체율이 급상승하며 글로벌 금융위기로 번졌다.

2000년대 초반 미국 부동산 가격 급등으로 모기지론 업체들이 경쟁적으로 담보대출을 확대했고 신용도가 낮은 비우량 고객에게 대출이 쏠린 결과다. 국내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치면서 환율이 급등하면서 키코(KIKO) 등 파생 외환상품에 가입했던 기업들이 막대한 손실로 문을 닫기도 했다.

주식시장은 급격히 냉각되면서 2008년 9월 14일 리먼브러더스 파산과 함께 코스피지수가 1000선을 밑돌기도 했다. 2000선을 다시 회복한 것은 2010년 12월 14일로 3년여 만이다. 이듬해인 2011년 5월 2일에는 사상최고치 2228.96포인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2010년 말 2000시대 재진입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건 외국인이었다. 당시 외국인은 한 해 동안 21조원을 순매수하면서 시장을 이끌었다. 미국 정부가 2009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양적완화(QE)를 실시하면서 풍부해진 유동성과 환차익에 따른 기대감이 외국인 순매수로 이어졌다. 외국인 순매수는 대형주에 집중됐고 자동차·화학·정유주가 급등하는 차·화·정시대란 신조어를 낳기도 했다.

2011년과 2012년 상반기까지 지수는 박스권을 오르내리는 장세를 반복했다. 중동 민주화사태, 일본 대지진, 포르투갈 구제금융신청,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의 미국 신용등급 강등, 김정일 사망, 유로존 국채 금리 상승 등 대외 여건이 급속히 변화하면서 등락세를 반복했다.

코스피지수는 국내외 굵직한 사건들을 반영하면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코스피지수 기준 시점은 1980년 개장 첫날=지수는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현재의 종합주가지수(KOSPI)는 1980년 1월 4일을 기준일로 100을 설정했다. 1983년부터 주가지수를 변경했지만 기준일을 3년 전 시점으로 정한 것이다. 지수 산출 방식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최초 지수는 1964년 1월 4일 한국거래소의 전신인 대한증권거래소가 미국 다우존스지수 방식과 유사하게 만든 수정 주가평균지수다. 당시 상장종목 15종목 가운데 12종목을 대상으로 산출했다.

이후 매년 증권시장 규모가 성장하면서 1971년 말 상장회사가 50개로 늘었고 12종목을 대상으로 발표하던 지수가 시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면서 1972년 한국종합주가지수(KOSPI)란 이름의 새로운 지수가 발표된다. 대상종목은 한국전력, 유한양행 등 35종목으로 확대됐다. 1978년 말 상장회사 수는 356개, 상장자본금은 1조9000억원으로 성장하면서 1979년 채용종목은 135종목으로 확대됐다.

지수 산출방식도 1983년을 기점으로 단순 주가 평균에서 기업규모를 고려한 시가총액 방식으로 변경된다.

코스닥 시장의 기준 시점은 개장 첫날인 1996년 7월 1일이다. 개장 이후 벤처산업에 대한 기대감으로 크게 성장한 코스닥지수는 기준지수 대비 3배 상승한 280포인트를 기록하기도 했으나 벤처 거품이 빠지는 과정에서 30포인트까지 급락하는 등 지수 절대값이 극도로 낮아지며 2004년 1월부터 기준지수를 100포인트에서 1000포인트로 상향했다.

이경민기자 kmlee@etnews.com

[그래프] 1980년대 이후 코스피 지수와 국내외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