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잘 들립니다.”
1994년 4월 17일,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6연구동 실험실. `CDMA 작전본부`라고 적힌 명패가 붙어있는 이 방에서 역사적인 통화가 시연됐다. 코드분할다중접속(CDMA)방식으로 이뤄진 세계 최초의 통화. CDMA 방식 이통통신서비스 기술 개발에 매달린 지 3년만에 이뤄낸 쾌거였다. 기쁨도 잠시, 연구진은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시스템 상용화를 위해서는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었기 때문이다.
![양승택 전 정보통신부 장관(당시 ETRI 원장)](https://img.etnews.com/cms/uploadfiles/afieldfile/2012/09/11/317003_20120911180033_750_0001.jpg)
한기철 당시 ETRI 이동통신 개통연구부장은 “CDMA 기반 기술은 확보했지만 이를 상용화하기 위해서는 단말기, 통신 시스템을 제품화하는 과정이 필요했다”며 “당시 연구진들 모두 CDMA 상용화를 전쟁에 비유할 정도로 치열한 과정이 이어졌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CDMA 상용화가 본격 논의된 것은 기존 이동전화 서비스 방식이 한계를 드러낸 1980년대 말 부터다.
1988년 7월 1일 한국이동통신이 미국 AT&T가 운용에 성공한 아날로그(AMPS:Advanced Mobile Phone Service) 방식 서비스를 시작했지만 이동전화는 일반인들에게 여전히 넘볼 수 없는 벽이었다. 단말기가격과 통화요금은 이동전화 대중화를 가로막았고 산업기반도 빈약했다. 시스템, 단말기를 모두 수입에 의존했고 국산제품이라고 해도 외국 제품에 상표만 바꿔 단 수준이었다. 서비스 품질에 대한 불만도 따랐다. AMPS 방식이 기술적인 한계를 드러내면서 2세대 이동통신인 디지털 이동통신 시스템 개발 필요성이 제기됐다.
선진국들은 아날로그 방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디지털 이동통신시스템 개발에 이미 뛰어든 뒤였다. 후발주자로서 가장 경쟁력 있는 방식을 찾는 것이 관건이었다.
선진국과 시장 주도권을 놓고 경쟁을 펼치기 위해 디지털 방식 기술을 자체 개발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주어진 주파수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접속 방식의 선택이 화두로 떠올랐다.
미국은 시간분할방식(TDMA)을 표준으로 채택했고 유럽은 유럽형이동전화(GSM) 방식을, 일본은 일본식디지털(PDC)방식 상용화에 뛰어들었다. 저마다 세계표준방식으로 유치하기 위해 물밑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디지털 이동통신시스템 개발을 주도했던 ETRI는 당초 TDMA방식 개발에 주안점을 뒀지만 이내 전략을 수정했다. TDMA방식이 처리할 수 있는 용량에 한계가 따를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기 때문이다.
ETRI는 당시 미국의 작은 벤처기업이었던 퀄컴의 CDMA기술에 주목했다. 기존 아날로그 방식의 10배, TDMA의 3배인 가입자 처리 용량과 뛰어난 전파 효율성이 장점으로 부각됐다.
무엇보다 당시 CDMA방식 서비스 상용화에 뛰어든 국가가 없다는 사실이 이동통신 기술 자립을 꿈꾸는 우리나라 요구와 맞아 떨어졌다.
부정적인 시선도 있었다. 검증이 되지 않은 기술 개발에 굳이 모험을 걸 필요가 있겠냐는 주장이 따랐다. 당장 정부·학계·산업계를 설득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CDMA방식의 디지털 이동통신 시스템을 상용화할 경우, 세계 이동통신 시장을 선점할 수 있다는 논리가 통했다.
1991년 5월 6일, 마침내 ETRI와 퀄컴이 CDMA 기술 공동개발 계약을 체결했다. 원천기술은 퀄컴 소유였지만 상용화 사업은 ETRI와 우리 산업계의 몫 이었다.
상용화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ETRI가 개발한 실험실 수준의 시스템을 제품화하는 것도 어려운 과제였지만 무엇보다 CDMA 상용화에 대한 정부 내 이견이 걸림돌로 작용했다. 다양한 디지털 이동통신 방식을 두고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CDMA 기술 도입의 주역인 경상현 당시 정보통신부 장관이 경질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이동통신 기술 자립화에 대한 열망은 결국 CDMA 기술 상용화로 귀결됐다.
1995년 10월 정통부가 PCS 개발 방식을 CDMA방식 단일 표준으로 지정하면서 상용화를 둘러싼 잡음 또한 사라졌다.
![1995년 6월 9일 코엑스에서 열린 정보통신전시회에서 당시 경상현 정보통신부 장관이 SK텔레콤 부스에서 CDMA 이동전화 시험통화를 하고 있다.](https://img.etnews.com/cms/uploadfiles/afieldfile/2012/09/13/213213213123.jpg)
1996년 1월, 마침내 한국이동통신이 세계최초 CDMA방식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후 4월에는 CDMA 방식 사용을 조건으로 사업 허가를 받은 신세기통신이 가세했다.
CDMA방식 상용화로 국내 이동통신 시장은 일대 변혁기에 접어들었다.
CDMA방식 디지털 이동전화 가입자 수는 서비스 개시 1년 5개월 만에 200만명을 돌파했다. 1996년 말 전체 이동전화가입자 318만명 가운데 27.8%에 불과하던 디지털방식 가입자 비율은 전체가입자(4백13만5천5백91명)의 49%까지 상승했다.
단말기·통신장비 제조업계 또한 CDMA 특수를 누렸다. CDMA 기술을 바탕으로 세계시장에서 기술적인 우위를 점했고 내수시장을 기반으로 덩치를 키워나갔다. 삼성, LG, 현대 등 CDMA기반 단말기 개발에 참여했던 기업들이 수혜를 입었다.
LG전자가 1996년 2월 국내 최초의 CDMA방식 휴대폰인 `LDP-200`을, 삼성은 4월 `SCH-100`을 출시하며 이동전화 국산화를 주도했다. 양사의 경쟁으로 수입 단말기 비중은 급감했다. 이동전화 서비스 초창기 시절, 국내 시장의 52%를 점유했던 모토롤라 단말기 등 수입제품을 우리나라 제품이 대체하기 시작했다.
국내 단말기 제조 기업은 든든한 내수 시장을 바탕으로 세계 시장에 안정적으로 진입했다. 우리나라 이동전화 단말기 수출액은 지속적으로 증가해 1996년 47만달러에 불과하던 것이 2003년 134억 달러까지 늘어났다.
나아가 시스템, 중계기, 계측기 등 CDMA방식 통신 시스템 생산이 활성화되면서 우리나라 경제는 이동통신 특수를 누렸다. 1996년 230만달러 규모의 CDMA 장비 수출액은 2000년 37억달러로 급증했다. 최근 ETRI분석에 따르면 CDMA상용화로 인한 경제적 가치는 무려 54조3923억원에 달한다.
◆ 양승택 전 ETRI 원장
“CDMA 상용화에 대해 반신반의 하는 분위기가 가장 큰 문제였죠. 실패를 생각하지 말고 전력투구하라는 주문과 질책을 쏟아 부었던 기억이 납니다”
CDMA 상용화 사업이 2단계로 접어들던 1992년, 양승택 당시 ETRI원장의 눈에 비친 연구진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밤낮없이 연구에 몰두하는 연구원들이 대다수였지만 CDMA 상용화에 대한 확신 없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직원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양 전 원장은 우선 CDMA개발에 전념하도록 직원들의 분위기를 다잡는데 주력했다. CDMA 상용화에 집중하기 위해 정부에 300여명의 인력 충원을 건의했고 전용 연구동 설립을 위한 자금 마련에도 주력했다. 1750명이었던 ETRI 정원은 1890명까지 늘어났고 이후 전용 연구동 마련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문제는 계속 발생했다. 퀄컴 측이 ATM 교환기 도입을 제안하는 등 ETRI와 노선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양 전 원장은 퀄컴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양 전 원장은 “퀄컴의 요구사항에 따르다보면 약속한 기간 내에 CDMA 상용화를 이루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고 당시 결정의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퀄컴과 경쟁관계로 돌아서자 양 원장은 연구진에게 속도전을 주문했다. 당시 삼성, LG 등 이동통신 단말기 제조기업 연구원 450여명과 연구를 진행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
그는 “이른바 동시공학 개념으로 CDMA 상용화를 추진했다”며 “연구실에서 탄생한 아이디어가 곧 프로토타입 제품으로 구현될 정도로 작업 속도가 빨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양 전 원장은 CDMA 상용화를 통해 우리나라 이동통신 시장이 급성장 할 수 있었다고 자부한다. TDX 개발, 행정전산망, CDMA 개발과 수출 실현 그리고 4세대이동통신인 와이브로 개발이 IT강국 코리아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자신하고 있다.
양 전 원장은 “CDMA 상용화 이전까지 국내 이동통신 시장은 기술적으로 선진국에 종속돼 있었지만 상용화 성공으로 통신 기술 자립화에 성공했다”며 “이후 와이브로, LTE-어드벤스 등 차세대 이동통신 기술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CDMA 상용화를 통해 얻은 경험과 자신감이 밑거름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호기자 snoop@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