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비즈니스/`9·15 정전사태` 1년 그 이후…]산적한 숙제들

지난해 9월 15일 오후 3시 대한민국은 한순간 일시정지 사태에 빠진다. 추석 이후 이례적으로 찾아온 무더위에 전력사용이 급증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주요 발전소들까지 정비에 들어가면서 초유의 정전사태가 발생했다. 예고 없는 정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불편과 피해를 감수했다. 그 후 1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아 보인다. 여름과 겨울 전력피크 때마다 정전을 걱정하는 위태로운 전력수급의 외줄타기를 지켜보고 있다. 9·15 정전사태 이후 많은 대책들이 나왔지만 국내 전력 상황은 아직 1년 전 그때에 머물고 있다.

전국 곳곳에 정전사태가 벌어진 지난해 9월 15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역 일대에 신호등 불이 꺼져 경찰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전국 곳곳에 정전사태가 벌어진 지난해 9월 15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역 일대에 신호등 불이 꺼져 경찰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9·15 정전 직후 정부는 재발방지를 위해 발빠른 대책 마련에 나섰다. 총리실 중심으로 정부합동점검반이 구성됐고 정전 10일 만에 재발방지대책을 내놓았다. 당시 전력당국이 계획한 정전 재발 방지책은 총 12개 주요과제에 25개 세부항목으로 △전력수급 안정화 △위기대응 시스템 개선 △절전 국민행동수칙 마련 △에너지 절약 △전력공급 역량 확충을 골자로 했었다.

1년이 지난 지금 이 25개 세부항목 중 일부는 아직 개선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거나 변경된 정책으로 인해 부작용이 우려되고 있다. 정전사고 예방을 위해 각 부처와 기관이 1년 동안 노력했지만 아직 남겨진 숙제가 산적해 있는 셈이다.

◇안심할 수 없는 정전대책

9·15 정전사고 이후 전력당국은 많은 조치를 추진했다. 전력경보단계를 관심·주의·경계·심각에 관심 단계를 추가해 5단계로 세분화했고 전력예비력도 급전지시 대응이 가능한 운영예비력 개념으로 바꿨다. 각 전력경보단계별 행동은 훈련을 통해 숙지하고 방송·SMS 등 여러 채널을 활용해 전력위기 상황을 전파하는 시스템도 갖췄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대책은 정전이 발생하기 이전 단계에 취해지는 조치의 비중이 높아 막상 정전이 발생하는 상황에서는 1년 전과 같이 대혼란을 자초할 수 있다. 9·15 정전 당시 시민들이 큰 혼란을 겪었던 가장 큰 이유는 급작스럽고 뚜렷한 구분 없이 무작위로 진행된 단전 조치 때문이었다. 고층 승강기가 멈추고 일부 병원과 군부대, 신호등 등의 사회 기반시설의 전력이 차단된 것도 구체화된 단전 우선순위 매뉴얼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전 순위 매뉴얼은 비상시 사회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으로 가장 먼저 조치가 취해졌어야 하지만 아직 구체안이 마련되지 않고 있다. 일단 군부대·주요 관공서·병원 등 주요시설은 단전 제외로 분류되어 있지만 나머지 건축물에 대해선 현재로선 정전사태가 발생할 경우 단전 주체인 한전이 현명한 판단을 해주길 바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차단선로를 분리해 주요 시설물에 대해선 단전조치에도 전원을 상실하지 않도록 하는 방안도 언급됐었지만, 8조 적자에 허덕이는 한전 입장에선 엄두도 낼 수 없는 사업이다.

정전시 유일한 희망인 비상발전기는 기대를 안하는 편이 낫다. 9·15 당시 수많은 비상발전기들이 설치만 되어 있을 뿐 가동하지 않으면서 정부는 실질운용을 위한 대책을 마련한다고 했지만 관리주체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다. 지금도 아파트 및 빌딩 지하에 있는 많은 발전기들이 생색내기용으로 있을 뿐 비상전원의 역할을 상실한 채 방치되어 있다.

◇외줄 타는 공급능력확보

전력 상황별 대응조치 강화가 단기적인 정전 대책이라면 공급능력확보는 중장기 대책이었다. 중장기 대책의 거시적 특징 때문일지 몰라도 이 역시 갈 길이 멀다. 정부는 공급능력 확보를 위해 불과 11개월 만에 준공을 계획하고 있는 평택복합화력 발전소 건설 등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하지만 발전소 건설은 일반적으로 3~5년에 달하는 공사 기간상 단기 공급능력 확보에 어려움이 있다.

궁여지책으로 정부는 지금의 발전소 운전시간을 늘리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정비기간을 줄이고 운전시간을 늘려 최대 공급능력을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이로 인해 발전설비에 피로도가 누적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국내 발전소들은 겨울철 전력피크가 발생하기 시작한 2010년부터 정비기간이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설비 피로도에 따른 고장이란 폭탄을 안고 가고 있는 셈이다.

비상시 기업들에게 절전활동을 요청하고 보조금을 지급하는 수요관리시장도 부담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부는 당장 공급능력을 확대할 수 없다보니 새로운 수요관리제도를 고안하는 등 수요관리시장 운영을 확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덕분에 현재까지 수요관리로 지출한 비용은 2500억원에 달한다. 지난해 두 배를 넘어서는 규모로 이미 전력산업기반기금에서의 배정분을 초과한 지 오래다. 초과 비용은 미수금으로 잡혀있으며 이를 메꾸기 위해 발전소지역발전, 신재생 산업 육성, 전력기술 연구개발 등에 쓰여야 할 기금을 수요관리로 전용하는 안이 국회에 대기 중이다. 정전 방지에 다른 전력산업 육성 기금이 줄어들 판이다.

발전회사들의 발전용량 거짓 입찰을 적발하기 위해 올해 3월달에 시행하기로 했던 감사는 이제야 시행을 앞두고 있다.

현재 산적해 있는 문제들이 미결상태로 남아있는 한 곧 다가올 겨울과 내년 여름에도 전력위기감은 여전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지식경제부내 전력수급팀을 별도로 구성해 전력수급에 대응해 나가고 있다. 올 겨울 미해결 과제에 대해 정부가 어떠한 대안을 마련할 지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소박스]정전 사각지대 비상발전기

9·15 정전사태 당시 고층 건물의 비상발전기가 정상 작동되지 않아 승강기에 승객이 갇히는 사고가 무려 1902건이 발생했다. 산업현장에서도 적기 정비를 하지 않은 비상발전기들이 가동하지 않으면서 많은 회사들이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형식적으로 설치만 되어 있고 가동하지 않는 비상발전기는 9·15 당시 주요 문제로 다루어졌다. 그리고 지난달 초 연이은 폭염과 열대야로 전력사용이 급증하면서 변압기 과부하로 20여곳의 아파트에 정전이 발생했지만 이때도 비상발전기는 가동하지 않았다.

국내에 있는 비상발전기의 수는 대략 6만1000여대로 용량 규모로는 2만㎿에 달한다. 원전 20기에 달하는 규모로 전력 위기 시 이중 일부만 가동을 해도 국내 전력수급에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다. 문제는 위급 시 가동할 수 있는 비상발전기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전력당국이 파악한 1㎿ 이상 비상발전기 중 수요감축 설비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전체 2227개 중 361개에 불과했다. 나머지 비상발전기는 당장 비상전원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의미다.

비상발전기가 정전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이유는 설치만 의무화 되어 있을 뿐 유지보수와 관리는 실상 아파트 관리사무소 등 고객 당사자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전기안전공사가 일부 담당을 하고 있지만 검사권한만 있을 뿐 설비관리 책임은 자가용 전기설비 기준상 건물 관리자가 지게 되어 있다. 설치만 의무화 되어 있다 보니 비상발전기를 들여만 놓고 운전을 안하는 현 작태가 벌어지고 있다. 유지보수를 위한 실부하 운전시험도 의무화 규정이 없다.

반면 해외에서는 비상발전기 운전을 인명과 연관 지어 항시 관리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은 비상발전기의 중요도를 3단계로 구분하고 인명보호와 관련 있는 1·2단계 설비에 대해 매달 발전기 정격의 30%이상 실부하 운전을 30분 이상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비상발전기의 고장은 승강기 고립사고와 같인 인명과 직결될 수 있는 문제인 만큼 정부차원에서 규정 의무화 및 관리·책임 기관을 명확히 명시해 줄 필요가 있다.

조정형기자 jeni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