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주년 대담]원로와 신세대가 보는 ICT의 과거·현재·미래

[30주년 대담]원로와 신세대가 보는 ICT의 과거·현재·미래

79세와 27세. 남성과 여성. 한 사람은 한국 정보화시대를 처음 열어젖혔고, 다른 한 사람은 갖춰진 고도의 인프라 위에서 독특한 아이디어로 벤처기업을 창업했다. 한 사람은 지금까지 거쳐 온 대표직만 10여개, 상대는 2년 4개월 전 처음 창업 전선에 뛰어든 스타트업 기업인이다. 전자는 이용태 퇴계학연구원 이사장(전 삼보컴퓨터 회장), 후자는 박희은 이음소시어스 대표다.

전자신문은 창간 30주년을 맞아 급변하는 세계 정보통신기술(ICT) 시장을 과거와 현재, 미래의 역사적 관점에서 조망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정보화 불모지였던 한국을 오늘날 세계적 정보대국 수준으로 끌어올린 주역 가운데 한 명인 이용태 이사장과 스마트 신세대 경영인으로 떠오른 박희은 대표가 서울 대학로의 이 이사장 사무실에서 대화를 나눴다. `연륜`과 `패기`의 만남이다. 스마트 혁명, 소프트 파워, 스타트업, ICT 거버넌스 등 최근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다양한 주제가 화제로 올랐다.

“13년 전, 젊은 벤처기업가와 미래를 주제로 이런 대담을 나눈 적이 있어요. 그는 이제 존경받는 기업인이 됐어요. 박 대표도 10년 뒤에는 그렇게 커 있길 바랍니다.”

이 이사장은 13년 전, 전자신문 창간 17주년 기념으로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이재웅 다음커뮤니케이션 창업자와 대담을 나눈 바 있다. 그때를 떠올리며 덕담으로 대담을 시작했다.

◇사회(장지영 통신방송산업부장)=ICT 시장이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있다. 소프트웨어 기업을 표방하는 구글과 애플이 패권을 장악하고 있다. 삼성전자 등 우리 기업도 빠르게 따라잡았지만 `스마트 혁명` 대응에 늦었다는 지적이 많다.

◇이용태 이사장=당연한 결과다. 정보산업연합회장을 20여년간 하면서 소프트웨어를 키워야 한다는 주장을 한결같이 해왔다. 그런데 행정전산화 말고는 제대로 육성한 적이 지금껏 없었다. 한번은 체신부 장관에게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데 5분도 안 돼서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안된다, 우리나라에 벌써 10만명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있는데 돈을 전혀 못 벌지 않는가”라고 하더라. 20년 전부터 제대로 소프트웨어 인력을 양성했다면 지금쯤 세계 소프트웨어 생산기지가 됐을 거다.

◇박희은 대표=스마트폰 기반 사업을 하는 사람으로써 우리나라 스마트폰 하드웨어가 밀린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나 부족한 건 실력 좋은 엔지니어다. 요즘 대학교 컴퓨터공학과나 전산학과를 보면 졸업생이 너무 부족하다. 그나마 졸업하고 나서도 의학전문대학원 등에 많이 가고 현업에서 뛰는 비중은 10% 남짓이다. 이사장님 말씀을 들어보니 당시 소프트웨어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산업 자체를 재미있고 뜻을 펼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지 못한 후유증이 지금 나타나고 있다.

◇이용태=내가 처음 컴퓨터를 만들려고 할 때 정부에서 내게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비교우위라는 것이 있다. 우리는 저임금 국가기 때문에 조립산업을 해야 하고, 첨단 컴퓨터는 선진국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프트웨어를 대하는 자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안 늦었다. 4~5년만 집중 투자하면 굉장한 엔지니어들이 나올 것이다.

◇사회=박 대표는 요즘 실력 있는 스타트업 기업인으로 꼽힌다. 처음 시작하며 어려운 시기를 넘겼을 것도 같은데.

◇박희은=2년 4개월 전 두 명이 시작해 지금은 40명 직원이 있다. 생각하는 그림이나 사람도 더 많아지고 해야 할 것도 많아졌다. 앞으로 50명, 100명, 보다 더 큰 기업으로 계속 키우고 싶은데 이런 성장 포인트를 예상해 대비하는 것이 조금 막막하기도 하다.

◇이용태=아주 안정된 벤처기업 CEO의 고민이라고 본다. 비즈니스를 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고급 기술이다. 지금 환경에서는 혼자서 고민하면 지나치게 비싼 수업료(실패 경험)를 지불해야 한다. 이미 겪은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적극 빌리는 것, 즉 실패에서 배우지 않고 타인의 경험 사례에서 배우는 지혜가 필요하다.

나도 내 실패를 경험 삼아 하나의 조언을 해 줄 수 있다. 삼보컴퓨터는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제품을 여러 개 내놨다. 스마트패드(태블릿PC)도 그 중 하나다. 그런데 성공하지 못했다. 이유는 조직이다. 새 상품을 개발했는데 기존 개발 부서에서 만들어 기존 영업부보고 팔라고 했다. 데스크톱PC는 하루에 100대씩 팔리는데 스마트패드는 일주일에 한 대 팔렸다. 실적을 내야 하는 영업부는 당연히 데스크톱PC에 집중했고 시장을 창출하지 못했다.

벤처가 하는 공통된 실수다.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할 때는 처음 벤처를 시작할 때처럼 충분한 기금을 모아서 투자하고 새로운 전담 부서를 만들어 론칭해야 한다.

◇박희은=이음 서비스가 자체 수익을 내기 시작하면서 다른 비즈니스를 구상 중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기존 조직에서 기획할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매우 유용한 조언이다.

◇사회=취업 대란과 함께 창업이 각광받고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 기존 기업체계에서는 수용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창업은 많지만 성공은 드물다.

◇박희은=20대로서 열정과 속도는 충분하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중요한 건 끈기와 위험에 대비하는 배짱이라고 본다. 창업 시작은 쉽지만 유지는 쉽지 않다. 창업 초기에만 관심과 자금이 몰리는 지금의 스타트업 풍토도 조금은 아쉽다. 초기 육성도 중요하지만 스타트업이 어느 정도 자랐을 때 다시 속도를 낼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주는 것도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 정도의 벤처기업을 우스개로 `샌드위치`라고도 한다. 대기업에서 사람 데려오는 건 힘들고 데려다 키운 사람들은 다시 지원받아 각자 창업한다. 기성 기업과 스타트업 사이에 끼인 샌드위치다.

◇이용태=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기업가 정신이 강하다. 예전의 과거제도부터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DNA가 심겨져 있다. 그래서 벤처산업을 뒷받침할 좋은 정서를 가지고 있다. 이걸 키워야 한다.

다만 실패에 대한 책임이 너무 크다. 실패가 쌓여서 성공확률을 높이는 실리콘밸리처럼 돼야 한다. 우리나라의 많은 젊은이가 벤처하다가 망하면 재기를 못하고, 이런 사례를 본 젊은이들은 두려워하기도 한다. 크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일도 있다. 시장에 안착하는 데 성공한 박 대표는 `백 명의 시체를 딛고` 일어서 있는 거다.

◇사회=올해 화두는 대선이다. 현 정부의 `IT 홀대`를 차기 정부에서는 꼭 극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현 ICT 거버넌스에 문제 제기도 많다.

◇이용태=대통령이 `이런 나라를 만들겠다`고 설득하고 국민은 이에 동의하는 것. 그걸 우리는 리더십이라고 한다. 다음 대통령은 모든 산업과 사회 시스템 밑바탕에 있는 ICT와 소프트웨어를 발전시키는 구체적 아이디어가 있어야 한다.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이 선진국의 핵심 자원인 인재를 키우는 교육이라면 두 번째가 ICT다. 이에 대한 비전과 `내셔널 어젠다(national agenda)`를 제시해야 한다.

◇박희은=벤처기업이 어떤 행동을 취하려고 할 때 어느 부처에서 확인을 해야 하는지 아직도 혼란스럽다. 명확하지 않으면 유연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우리 소관이 아니다`는 관료주의 경직성도 아직 남아 있다. 또 창업이라는 게 일종의 국가 어젠다처럼 제시돼 있는데 한 부처에서 힘을 모아 진행하는 게 아니다. 수십 가지 경진대회, 지원시스템이 있고 속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보여주기이거나 추가 후속 계획이 없다. 추진력 있는 통일된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사회=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이용태=이른바 `스마트 혁명`을 유발한 애플 아이폰을 보면 새로운 기술로 세계 시장을 휩쓴 것이 아니다. 이미 다 있는 기술을 아이디어로 조합한 거다. 성공하려면 아직 없는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세계를 휩쓰는 방법이 첫 번째지만, 아이폰처럼 이미 나와 있는 기술을 조합하는 아이디어로도 가능하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소수 정해진 사용자를 위해 미국 국방성 `아르파넷(ARPANET)`에서 시작한 인터넷을 전 인류가 사용하면서 사실상 누더기가 됐다. 이 누더기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새로운 인터넷, 차세대 인터넷을 한다면 어떨까. 미국은 못 해도 한국은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예는 교육시스템이다. IT를 도입한다고 하지만 제대로 안 되는데 깨끗하게 정리해서 진정한 스마트러닝을 구현하는 것이다. 이런 혁신으로 선진국이 될 수 있다.

◇박희은=융합도 중요한 것 같다.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이과였다가 수능을 문과로 치고자 재수를 선택했다. `사탐`을 고등학교 시절 거의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미래가 정해지지 않은 고등학생을 그런 식으로 갈라놓는다.

기업 CEO가 인문학 강의를 잠시 듣는다고 융합형 인간이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360도를 볼 수 있는 시각을 길러주는 교육시스템이 필요하다.

두 사람은 현재의 교육 문제를 놓고 긴 이야기를 나눴다. 이 이사장은 자신이 설립한 퇴계학연구원에서 우리나라 교육시스템 수준을 한 단계 높이기 위한 연구와 강연, 저술에 집중하고 있다. 박 대표는 문·이과로 획일화된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에서 일종의 피해를 본 당사자다.

이 이사장은 대담을 끝내고 “박 대표, 빨리 돈 많이 벌어서 교육 연구를 지원해달라”며 진담반 농담반의 제안을 했다.

황태호기자 thhw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