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30주년 특별 인터뷰] 김광호 전 삼성전관 회장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 전자업계를 이끄는 대표 주자이자 거목으로 자란 삼성전자. 지난 1969년 1월 설립된 삼성전자공업이 모태다. 본지는 창간 30주년을 맞아 삼성전자 출범 당시부터 1999년까지 30여년간 삼성전자의 토대를 일군 김광호 전 삼성전관(현 삼성SDI) 회장을 만나 지금의 삼성전자를 있게 한 결정적 장면들을 돌아봤다. 우리나라 전자산업 1세대를 대표하는 김 회장의 격정적인 회고는 다가올 30년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초심(初心)을 일깨우는 커다란 울림이 되기에 충분했다.

[창간 30주년 특별 인터뷰] 김광호 전 삼성전관 회장

◇한 달 반 만에 다시 지은 TV 공장

김광호 회장은 1964년 동양방송 공채 엔지니어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한양대학교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직후였다. 김 회장을 비롯한 엔지니어 20여명은 동양방송 개국 초기 장비 국산화를 담당했다. 그러던 1968년 말 삼성이 전자회사를 설립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범삼성계열이었던 동양방송에서도 전자 회사로 갈 사람을 뽑았다. `내가 가겠다`고 손을 들었다. 이후 일본으로 6개월 연수를 다녀온 후 곧바로 TV 생산 업무를 맡았다.”

김 회장이 기억하는 초기 삼성전자는 `경험과 지식도 없지만 무조건 해보는 것` 자체였다. 일본에서 500대 분량의 TV 부품을 들여와 조립에 들어갔지만 완제품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수도 없이 납땜을 하다 보니 PCB 동박이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제대로 TV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 3월에 이르러서다. 하지만 TV 생산 확대가 순조롭게 이뤄지던 1978년 삼성의 TV 사업은 큰 위기를 맞는다. 화재로 공장이 전소한 것이다.

“1978년 11월 1일 TV 공장에 큰 불이 났다. 그해 수출 실적 집계가 마감되는 10월 말 시점을 맞추고자 생산량을 급격히 늘리던 시기였다. 얼마나 큰 불이었는지 소방관도 두 명이나 사망했다. 피해액은 60억원으로 그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였다.”

그해 초 TV사업부 이사로 승진한 김 회장은 곧바로 공장 재건에 돌입했다. 하지만 당시 건설 붐으로 자재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앞뒤를 잴 시간이 없었다. 삼성중공업에서 빼앗아오다시피 철골을 구해오고 컨베이어, 계측기 등 생산 장비도 다시 조달했다. TV 생산이 재개된 것은 12월 중순이었다. 화재가 난 지 한 달 반 만에 공장을 다시 가동한 것이다.

“협력사와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일본 업체들은 본사 전시장에 있던 계측장비까지 내주고 부품 업체들도 재고 목록을 가져와 필요한 것을 마음대로 고르라고 할 정도였다. 그동안 쌓은 신뢰와 주변의 도움 덕분에 정확히 12월 15일 TV 생산을 재개했다.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저돌적인 추진력으로 초기 TV 사업을 이끈 김 회장은 1979년 삼성 반도체 사업의 구원투수로 영입된다.

◇메모리 반도체, 반드시 극일(克日)할 것

반도체사업부 이사에 이어 1981년 삼성반도체통신 반도체사업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긴 김 회장은 1983년 64K D램 개발을 주도한다. 우리나라 메모리 반도체 신화의 서막을 열어젖힌 것이다. 삼성은 미국 마이크론으로부터 기술 지원을 받아 6개월 만에 제품 개발에 성공한다.

“부천 시스템 반도체 공장에 D램 개발 설비를 들여놓기 시작했다. 근본이 다른 두 개의 라인을 한 개의 팹에서 구현한 것이다. 제대로 된 설계도도 없이 클린룸을 만들고자 공장 한쪽에 비닐을 쳐놓고 공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후 64K D램 개발 성공을 다짐하며 직원들이 무박 2일에 걸쳐 64㎞ 행군을 하기도 하고 밤샘을 밥 먹듯 하며 개발에 몰두했다. 그리고 결국 미국, 일본에 이어 세 번째로 64K D램 개발에 성공한다. 김 회장은 당시의 감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64K D램 개발은 삼성이 첨단 기술을 갖춘 업체로 국내외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첫 번째 사건이었다. 개발 발표 이후 재고로 쌓여 있던 삼성 전화기가 동이 날 정도로 파급 효과도 엄청났다. 하지만 개발을 모두 끝내고도 미국, 일본 등 경쟁 업체의 견제를 우려해 발표 시기를 늦추기도 했다.”

이후 10여년간 김 회장이 반도체 사업을 이끌던 시기 삼성전자는 D램 기술 개발에 속도가 붙었다. 그리고 1994년 드디어 256M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일본을 제치고 반도체 기술 자립에 성공했다. 1980년대 후반 IBM, HP 등 미국 고객사를 찾아가 메모리 시장에서 반드시 일본을 넘어서겠다고 공언한 그의 의지가 실현된 순간이었다.

“시장을 석권한 일본 메모리 업체들에 반감이 싹트고 있었던 시기였다. 또 일본 업체의 가격 횡포도 심했다. 고객사에 기술로 신뢰를 심고 납기와 물량 등 신의를 지키고자 노력한 것이 서서히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결국 1993년 삼성전자는 D램에 이어 메모리 반도체 전체 시장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이후 삼성전자는 과감한 선발 투자와 미세공정 전환 등에서 업계를 선도하며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이병철 회장의 기억 “김군아, 내 말이 맞제?”

1987년 9월 어느날 김 회장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내일 당장 기흥 3라인 기공식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기흥 1, 2라인 공장 가동률이 50%도 안 되고 반도체 사업 적자는 쌓여만 가던 시기였다. 안팎에서 반도체 사업 회의론이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故(고) 이병철 회장은 직접 신규 라인 건설을 결심하고 다음날 기흥을 찾았다.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던 기흥 3라인 기공식이 바로 이병철 회장의 마지막 공식 행사가 됐다. 이 회장은 그해 11월 작고했다.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기흥 공장을 찾아 반도체 사업에 무한한 관심을 보이던 이병철 회장이 `김군아, 저기에 공장을 하나 더 지으면 밸런스가 맞제?`라며 3라인 건설에 애착을 보였다. 하지만 나는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기흥 3라인은 이듬해인 1988년 10월 가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PC 붐으로 D램 품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반도체 매출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기흥 3라인을 본격 가동하기 시작한 10월부터 석 달간 삼성 반도체 사업 흑자는 1700억원에 달했다.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이후 10여년간 쌓인 누적적자 1300억원을 일거에 회복하고도 남은 것이다. 김 회장은 이때 쌓인 자신감이 삼성 반도체 사업의 튼튼한 기반이 됐다고 회고했다.

“이병철 회장의 혜안이 없었다면 지금의 삼성 반도체도 없었을 것이다. 이병철 회장이 더 오래 살아계셨다면 되레 공장을 서둘러 짓지 않았다는 문책으로 `잘렸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김 회장은 재벌체제의 과오에 논란도 있지만 흔들림 없는 의지로 산업 기반을 일군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진정한 동반성장 실천해야

김 회장은 반도체를 비롯한 국내 산업이 지속 발전하기 위해서는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이들이 대접받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도체를 포함한 국내 전자 산업 초창기에는 어떻게든 해낸다는 의지를 가지고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킨 사람들이 대접받는 시대였다. (죽어라고) 일만 하면 먹고 사는 데 큰 걱정은 없었다. 직원들에게 주식을 나눠주고 임원들에게는 스톡옵션도 줬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에게는 그런 희망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

김 회장은 창의적이고 젊은 인재가 반도체 산업에 많이 유입될 수 있도록 성공 사례를 만들고 적절한 보상을 해줘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부품·소재·장비를 아우르는 협력사와의 진정한 상생 관계 구축도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전방 업체가 세계 일류가 되기 위해서는 후방 협력사도 진정한 세계 일류가 돼야 한다. 자금 지원 등을 포함한 폭넓은 협력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또 협력사도 번 돈을 꾸준히 재투자해 기술 개발에 나서야 한다.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김 회장은 72세라는 고령에도 두 시간이 넘는 인터뷰 내내 초안 없이 정확한 기억력과 창창한 목소리로 지난 30여년을 회고했다. 마지막으로 삼성전자는 물론이고 국내 전자업계 후배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청춘을 바쳐 터를 닦은 삼성전자가 이제 세계적인 회사가 돼 후배들에게 무척 고맙게 생각한다. 나를 비롯한 1세대도 많이 노력했지만 후배들이 더욱 열심히 가꿔서 더욱 멋진 나라를 만들어 달라.”

양종석기자 jsyang@etnews.com

사진=박지호기자 jihopres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