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 비사]<110>숨 가빴던 순간들

TDX-숨 가빴던 순간들

고생 끝에 즐거움이 온다는 고진감래(苦盡甘來).

이를 생생하게 보여준 `대하드라마`가 `TDX 개발`이다. 개발비 240억원. 연구인력 1014명이 피와 땀을 흘렸다. 이들은 직위나 직책은 달라도 TDX 개발 의지는 동일했다. 1014명의 인고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다. 이들이 한국 정보통신 미래를 연 주역(主役)이었다.

[이현덕의 정보통신부 비사]<110>숨 가빴던 순간들

전두환 대통령은 `기술입국`을 위해 1982년부터 기술진흥확대회의와 기술진흥심의회의를 신설해 주재했다. 전 대통령은 기술개발이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신념을 갖고 정책주도형 리더십을 발휘했다. TDX 개발은 전 대통령의 주요 관심사였다. 청와대 경제수석실과 체신부는 수시로 TDX 개발 진도를 보고했다.

홍성원 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시스코시스템즈코리아 회장 역임)의 증언.

“전 대통령은 기술개발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어요. TDX나 반도체 개발, 타이콤, 핵발전소 건설 등이 그 당시 추진한 사업입니다.”

체신부는 수차례 전 대통령에게 “1986년부터 TDX를 공급하겠다”고 보고했다.

TDX 개발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한국전기통신연구소(현 ETRI)는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았다. 연구원들은 밤잠을 잊었다.

그해 말, 양승택 TDX개발단장(정통부 장관 역임, 현 IST컨소시엄 대표)은 남은 연구비 5억원 중 3억원을 성과급으로 받아왔다.

양 단장의 회고.

“김성진 체신부 장관(과기처 장관 역임, 작고)에게 `전두환 대통령이 연구개발에 성공한 사람은 팔자를 고쳐주라고 하셨으니 연구비 남은 것 일부를 연구원들에게 인센티브로 지급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건의했다. 김 장관은 흔쾌히 3억원을 주었다. 이 돈을 TDX개발단과 TDX 과제 수행자, 행정부서까지 다 분배했다. 나한테는 150만원밖에 오지 않았다.”

개발단은 뒤에 `TDX 육사(陸士)`로 불렸다. 육사생도처럼 기강이 엄격하다는 의미였다. 1984년 1월 14일 ADD 소장 출신의 서정욱 박사(과기부 차관, 장관 역임)가 TDX사업단장과 품질보증단장으로 부임했다. 사업단장은 대우나 위상에서 ADD 소장과 비교할 게 못됐지만 그의 업무처리는 날이 시퍼렇게 서 있었다. 그는 TDX 성공을 위해 악역(惡役)을 마다하지 않았다.

서 박사는 이우재 사장(체신부 장관 역임)에게 “사장직속으로 품보단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주위에서 “품보단이 얼마나 복마전인데 왜 골치 아픈 품보단을 맡으려고 하느냐”며 극구 말렸다.

서 박사는 TDX 연구개발을 관리하면서 통신공사 조달규정과 절차를 과감하게 바꾸었다.

서 단장은 개발단에 보고서 작성도 하지 않도록 조치했다. 당시 개발단은 과제별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 중에는 1000쪽이 넘는 것도 있었다.

박항구 TDX개발단 부장(TDX개발단장, 현 소암시스텔 회장)의 기억.

“연구원은 일이 줄어들자 좋아했어요. 서 단장이 취임 후 얼마 안 돼 개발단을 방문했어요. 개발단은 매년 연구보고서를 만들었는데 대략 30권쯤 됐어요. 그 보고서를 책장에 진열해 놓았는데 서 단장이 보고서를 꺼내 보더니 “이런 정신상태로 무슨 일을 하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외부에서 만든 보고서 규격이 약 5㎜ 차이가 났습니다. “보고서 하나도 똑같이 만들지 못하면서 무슨 TDX를 개발하겠느냐”면서 기를 팍 죽였어요.”

서 단장은 조직을 정형화하지 않았다. 학연과 지연이 판치는 사회에서 그는 인사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품질보증단 품질기술부장으로 ADD에서 품질표준을 담당하던 이광진 부장(표준연구단장, 부산지역본부장 역임)을 데려 온 것이 유일했다.

나머지는 구성원에게 “당신과 일할 사람은 당신이 데리고 오라”고 지시해 충원했다. 그는 형식보다 내실을 중요시해 조직을 게릴라식으로 운영했다.

그는 가까운 선후배의 만남도 모두 뿌리쳤다. “건방지다”는 등 그를 향한 험구가 쏟아졌다.

1985년 어느 날 서 단장을 가장 음해하고 다니던 A업체 사장이 면담을 요청했다.

서 단장은 “또 무슨 험한 소리를 하러 왔나”면서 그를 만났다.

A업체 사장은 단 둘이 남게 되자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서 단장을 1년간 지켜보니 진심을 이제 알게 됐소. 서 단장 말대로 하니 모든 일이 잘됐습니다. 충고 하나 하겠소. 장사하는 사람이 주는 물은 물이 아니라 독입니다.”

어느 날 1층 경비실에서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빨리 몸을 피하라”는 전화였다. “무슨 일이로?”

“네 지금 상이용사들이 몰려 와 단장님을 만나겠다며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짐작 가는 게 있었다. 엄격한 품질관리를 하자 납품을 못하게 된 B업체가 상이용사들을 동원한 것이었다. 서 박사는 엘리베이터 앞까지 나가 이들을 안내해 품질보증의 불가피성을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처음에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우리를 이렇게 대접해도 되는 거요”라며 노기등등하던 그들도 나중에는 “우리가 잘못했다”며 돌아갔다.

강진구 삼성전자 사장(삼성전자 회장 역임)과의 일화 하나.

삼성반도체통신에서 만든 교환기에 문제가 자꾸 발생했다. 서 단장이 강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게 뭡니까. 창피하지 않습니까.”

“미안합니다. 문제를 곧 해결하겠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자 강 사장은 부인이 사용하던 헤어드라이기를 가지고 교환기를 생산하던 구미 공장으로 바람처럼 달려갔다. 강 사장은 연구진과 헤어드라이기를 켜놓고 교환기에 열을 가하면서 원인을 규명했다. 연구진이 “30분마다 중단된다”고 보고하자 강 사장은 “5분마다 중단되도록 하라”고 지시해 결국 문제를 해결했다.

서 단장의 현장 점검은 밤낮이 따로 없었다.

당시 개발단 교환기기실장으로 일했던 박권철 박사(현 ETRI 본부장)의 경험담.

“주말인데 새벽에 서 단장이 전화를 하셨어요. 화중절단 상태를 점검하신 거죠. 두 시간 동안 시간을 끌며 별 이야기를 다 했습니다. 통화 중에 절단됐으면 저는 박살나는 거죠. 다행히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현장 점검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서 단장은 전국 읍, 면 지역까지 다 돌아다녔다. 이때 경북 고령전화국에 근무하던 이성재씨(현 알에프윈도우 회장)가 성실성과 뛰어난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사업단으로 발탁됐다.

전국을 다니다 보니 1년이면 자동차 주행미터가 한 바퀴 돌아 처음으로 돌아왔다.

그럴 때마다 운전기사가 말했다.

“단장님 자동차가 방금 새 차로 바뀌었습니다.”

그의 캐치프레이즈는 `미쳐야 미친다`였다. 서 단장은 문제 있는 곳이면 5분 대기조처럼 즉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서 단장과 같이 수시로 현장에 달려갔던 박항구 부장의 말.

“상용시험을 할 무렵 가평에서 주말마다 낙뢰가 떨어졌습니다. 시스템이 다운돼 전화가 불통됐어요. 그때마다 대전에서 가평으로 달려갔습니다. 서 단장을 모시고 갔는데 전화국 안 의자에 앉아 밤을 새웠어요. 서 단장이 문헌을 찾아보면서 새 접지방식을 개발해 낙뢰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큰일을 하신 겁니다.”

서 단장은 품보단에 지시해 접지 규정을 새로 만들었다. 이후 낙뢰 피해는 크게 줄었다. 낙뢰 해결은 전화망 고장률 감소와 전화 품질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사 단장은 공사에 처음 사무자동화 기기를 도입해 이를 공사 전체로 확산시켰다.

연구소는 효율적인 개발을 위해 몇 차례 TDX개발단 조직을 개편했다.

1985년 10월 22일 개편한 조직은 단장 아래 3개 부서를 두어 업무를 세분화했다.

교환시스템연구부장은 유완영 박사(오리온전기 사장 역임)가 맡고 산하에 교환시스템연구실과 개발체계연구실, 품질보증실, 원격장치개발실을 설치했다. 하드웨어연구부장은 박항구 박사가 담당했고 산하에 프로세스개발실과 교환기회로개발실, 출입회로개발실, 신호처리개발실, 교환설계개발실, 개발환경연구실을 두었다. 소프트웨어연구부장은 천유식 박사(현 한국머털테크 회장)가 맡고 산하에 운용체계연구실과 소프트웨어공학연구실, 호처리소프트웨어개발실, 운용소프트웨어개발실, 보전소프트웨어개발실, 시험소프트웨어개발실을 두고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TDX 개발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던 1985년 10월 6차 5개년계획에 TDX-10 개발이 포함됐다. 계획수립에 양승택 단장이 참여했다.

이와 관련한 양 단장의 회고.

“TDX-10은 개발비가 TDX보다 많은 600억원이 필요한 것으로 판단했다. 중간에 얼마라도 삭감할 것을 예상하고 560억원을 개발비로 산정해 올렸다. 놀랍게도 전액 반영됐다. 나는 산출근거를 갖고 있지 않았다. 급히 연구소로 달려와 개발비 산출근거를 만들어 소장 결재를 받았다. 그리고 그 내용을 체신부와 통신공사로 보냈다. 뒷말이 나오지 않았다.”

ETRI 안에 `연구소원의 집`이 서 있다. 523㎡ 규모로 지하 1층 지상 2층이다.

이 집은 교환기 생산 4사에 전원장치를 공급한 이건수 동아전기 사장(현 동아일렉컴 회장)이 기증했다. 이 사장은 어느 날 1억원을 연구원 격려금으로 사용해 달라고 박항구 부장에게 맡기고 갔다. 박 부장은 이런 사실을 양승택 단장과 경상현 소장(정통부 장관 역임, 현 KAIST 겸직교수)에게 보고한 후 이 사장의 동의를 얻어 연구원들이 쉴 수 있는 건물을 짓기로 했다. 건물은 1989월 12월에 완공했다. 도중에 공사비가 모자랐다. 이 사장에게 사정을 말했더니 흔쾌히 추가로 7000만원을 기부했다.

TDX 개발을 지휘해온 양승택 단장은 1986년 4월 15일 한국진흥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후임 단장은 박항구 부장이 임명돼 TDX-10 개발을 주도했다.

서 단장은 TDX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후 1990년 1월 통신공사 부사장으로 임명됐다.

1987년 7월 1일 오전 10시.

서울 세종문회관 대강당에서 `전국 자동화완성 기념식`이 열렸다.

전두환 대통령은 이날 치사를 통해 “지난 1980년 말 284만회선에 불과했던 전화시설이 올해 1000만회선 달성이라는 신기록을 세웠다”면서 “정부는 이 같은 전기통신분야의 성과를 발판으로 정보화시대 핵심과제인 국가전산화 사업을 본격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TDX 개발은 고난의 여정이었다. 하지만 성공의 열매는 크고 달았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