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D램과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갈수록 지배력을 확대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합한 D램 시장 점유율은 64%에 달한다. 세계 시장의 3분의2에 달하는 비중이다. 반도체 미세 공정 기술을 주도하면서 격차를 벌인 결과다. 시장 점유율이 낮은 기업들은 미세화 공정에 투자할 여력이 없다. 이대로 간다면 기술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한국 기업들의 점유율은 더욱 높아질 수 있다. 미세화 공정 기술은 곧 원가 경쟁력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가격이 떨어지더라도 원가 경쟁력을 확보한 기업들만 살아남게 되는 것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원리다.
그런데 근본적인 문제에 봉착했다. 미세화 공정의 기술적 한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30나노 양산 공정 단계에서부터 미세화의 한계가 서서히 보이더니, 20나노 이하 공정 기술은 아직 뚜렷한 답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과거에도 똑같은 우려는 있었지만 미세화 공정이 진전될수록 `조금 더` 줄이는 것이란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다면 반도체 시장은 더 이상 기술로 승부하지 못한다. 범용 제품이 범람하고 오로지 가격 경쟁만 남게 된다. 미세화가 지연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후발 주자들이 기술격차를 줄이며 추격하면 시장은 출혈 경쟁 속으로 빠질 수 있다. 더 이상 반도체 시장에서 고부가가치를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반도체 업계는 미세화 공정 연구와 동시에 아예 다른 길도 모색하고 있다. P램·M램·Re램 등 차세대 메모리가 그것이다. 현재로선 개념 정도만 나와 있을 뿐 방향조차 정해진 것이 없는 그야 말로 미래 메모리들이다. 가깝게는 수년 후, 멀게는 수십년 후 반도체 시장의 주인공이 될 차세대 메모리를 진단해 본다.
◇D램·낸드플래시, 미세화 한계=메모리 반도체는 각 셀마다 0과 1이라는 디지털 신호를 나타내 데이터를 기억하는 장치다. D램은 캐패시터에 전하가 가득차 있다면 1, 없으면 0으로 구분한다. 전하를 채우는 캐패시터는 밑변이 좁고 높이가 긴 관 형태다. 미세화가 진행된다면 밑변은 더 좁게, 높이는 더 길게 만들어야 한다. 밑변이 좁아질수록 관은 버티기 힘들다. 이미 30나노 대의 제품만 해도 밑변과 높이의 비가 세계 최고층 빌딩 비율의 4배가 넘는다. 그만큼 미세화가 어렵다는 뜻이다. 낸드 플래시도 마찬가지다. 플로팅 게이트에 전자를 저장하는 것으로 0과 1을 구분하는 구조는 D램과 다르지만, 미세화가 한계에 부딪힌 점은 같다. 10㎚급에 160개의 전자를 저장할 수 있는데, 미세화가 진전되면 전자를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 전자가 조금만 유실돼도 특성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업계는 완전히 새로운 구조를 도입하더라도 미세화 한계를 넘어서야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D램·낸드플래시와 다른 차세대 메모리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차세대 메모리 무엇이 있나=차세대 메모리는 D램과 낸드플래시의 미세화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고안된 기술들이다. 미세화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물론 두 메모리의 단점까지 보완하려는 것이 특징이다. D램처럼 빠르면서 낸드플래시의 비휘발성을 갖춘 메모리를 개발하려는 것이다. 구조가 간단해 대량 양산을 시작할 때 생산 원가가 적고, 기존 메모리 대비 전력 소모량도 개선할 수 있다. 차세대 메모리로 거론되는 P램·M램·Re램 모두 이들 특성을 만족하는 메모리다. 개념은 비슷하다. 세 반도체 모두 저항이 높으면 1, 저항이 낮으면 0인 상태로 구분한다.
P램은 상변화(Phase Change) 메모리의 준말이다. PC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온도 변화에 따라 실리콘이 결정(Crystaline)·비정질(Amorphous) 상태로 바뀌는 것을 이용한다. 균일한 결정 상태에서는 전하의 흐름이 원할해 저항이 낮고, 비정질 상태는 반대다.
M램은 자성(Magnetic)을 이용하는 메모리다. STT(Spin Transfer Torque)-M램이라고도 불린다. N극과 S극의 자성을 띈 물질의 방향에 따라 전하가 움직이는 원리를 활용했다.
Re램은 말 그대로 저항(Resistive)을 활용한 메모리다. 산화물에 가하는 전압 때문에 전류가 흐르는 통로가 생성되기도 하고 끊기기도 하는데, 이를 각각 0과 1로 설정하는 반도체다.
이들 메모리는 속도가 빠를 뿐 아니라 쓰고 지우는 동작을 기존 반도체보다 더 많이 더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차세대 메모리와 달리, 현재 D램·낸드플래시 공정의 미세화를 극복하기 위해 3차원으로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도 진행되고 있다. 서울대 박병국 교수팀은 3차원 메모리 기술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본부장은 “반도체 산업 미래를 위해 차세대 메모리 개발을 지원하는 국책 과제도 진행 중”이라며 “기업이나 학계에서도 시장을 선도하기 위해 차세대 메모리 개발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새로운 시장부터 뚫어라=차세대 메모리가 언제 어떤 용도로 상용화될 지에 업계의 관심이 쏠려 있다. 지금까지는 D램·낸드플래시와 가장 가까운 성질의 차세대 메모리가 시장을 대체해 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새로운 시각도 나오고 있다. 이들 차세대 메모리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면서 자리잡은 후 완전한 대량 생산 체제가 갖춰진 뒤야 D램·낸드플래시 시장을 대체할 것이라는 의견이다. 처음부터 D램과 낸드플래시 시장에 진입하기에는 생산 비용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나기 때문이다. D램과 낸드플래시는 미세화 공정의 한계가 있다고는 해도 충분히 검증된 생산 시스템을 갖췄다. 이를 새로운 메모리가 대체하기에는 역부족일 수 있다.
최근 SK하이닉스와 IBM은 P램 공동 개발 제휴를 맺으며 새로운 시장을 내다봤다. 서버용 버퍼 메모리인 SCM(Storage Class Memory) 분야를 개척하겠다는 것이다. 이들은 P램을 SCM이라는 버퍼 메모리로 활용해 데이터 처리 속도를 올릴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P램은 낸드플래시처럼 비휘발성 특성을 가지면서 D램처럼 빠르다. 메모리·저장장치·CPU를 오가는 데이터의 움직임을 효율적으로 지원해줄 수 있다는 이야기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D램과 낸드플래시는 미세화 벽에 부딪혔다고 해도 조금씩 더 기술 발전을 이뤄내면서 기존 시장을 지켜갈 것”이라며 “차세대 메모리는 우선 새로운 시장부터 진입해 그 영역이 넓혀질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협력 전선 확대=최근 반도체 업계에서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적과의 동침까지 불사할 만큼 합종연횡이 활발하다. SK하이닉스는 M램 공동개발을 위해 지난 해 일본 도시바와도 손을 잡았다. 특허 상호 라이선스는 물론 합작사 설립까지 합의했다. SK하이닉스는 지난 2010년 Re램 상용화를 위해 HP와 제휴를 맺기도 했다.
삼성전자의 움직임은 더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삼성전자는 M램 개발을 위해 미국 벤처기업인 그란디스를 인수하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차세대 메모리 개발을 위해 경쟁자인 마이크론과의 협력을 발표하기도 했다. 인피니언도 수년간 IBM과 공동 개발해 M램을 개발했다고 발표하며 차세대 메모리 경쟁 대열에 합류했다.
문보경기자 okm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