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주행도 일품, 아우토반서 만난 '도요타 86'

모두가 잠든 이른 새벽, 아키나의 산길을 미끄러지며 빠르게 내려오는 흰색과 검정색 투톤의 스포츠카를 만난 이들은 유령이라고 말했다. 그 아키나의 유령은 전 세계적으로 마니아들을 양산하며 드리프트의 마력에 빠지게 만든 도요타의 `트레노`, 코드명 `AE86`이었다. 뒤 늦은 86 열풍으로 스포츠카 개발에 잠시 주춤했던 도요타가 움직였고, 마침내 우리 곁에 그 이름을 물려받은 새로운 스포츠카 86이 다가왔다.

도로주행도 일품, 아우토반서 만난 '도요타 86'

스바루와의 공동 개발을 통해 낮은 무게 중심을 가능하게 한 4기통 2.0 직분사 박서엔진을 장착하고, 예전 86이 그랬던 것처럼 힘은 넘치지 않지만 최고 수준의 뛰어난 밸런스로 무장한 새 86은 스포츠카 마니아들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뜨겁게 달구기에 충분했다. 한국에도 공식 출시되어 사랑을 받고 있는 새 86을 일본 아키나의 산길도, 한국의 서킷도 아닌 자동차의 본고장 독일의 폐쇄된 공항과 속도 무제한인 아우토반에서 다시 만났다.

한 때 파일럿 훈련과 육군 헬리콥터 공항으로 이용되었던 독일 맨딕 비행장. 지금은 다양한 자동차 브랜드들의 테스트 및 레이싱 프로그램에 활용되고 있는 그 곳에서 86으로 코너링, 급제동, 슬라럼, 가속, 빗길 주행 등의 다양한 테스트를 해 볼 수 있었다. 이미 한국에서의 시승을 통해 경험했던 뛰어난 밸런스는 한계 상황까지 몰아 부치는 비행장 레이스 코스에서도 빛을 발했다. 이번 체험을 통해서 일반 도로에서는 쉽게 경험하기 힘든 86의 한계를 경험할 수 있었고, 잠재된 가능성도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오후에 레이싱 드라이버들이 모는 86에 동승해 경험한 드리프트 퍼포먼스는 환상적이었지만, 먼 독일의 폐쇄된 공항까지 날아간 만큼 참석한 기자에게도 조금이나마 드리프트를 연습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더 좋았을 텐데 동승만 허락된 것은 아쉬웠다. 국내 시승을 통해 이미 86의 매력적인 드리프트를 조금 경험했었는데, 충분히 짐작이 가능한 순간에 매우 정직하게 뒤가 흐르는 86의 모션은 조금씩 더 높은 수준의 드리프트를 연마하고픈 욕구에 불을 붙였다.

다음 날에는 86을 몰고 쾰른 근교의 국도와 아우토반을 달렸다.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절의 깔끔한 국도에서는 수동 변속기의 정교한 움직임과 민첩한 응답성, 예리한 핸들링을 즐길 수 있었다.

아이스 와인 산지의 포도밭 가운데 있는 고택을 개조한 식당에서 피자로 점심을 먹고, 언덕 위의 아름다운 저택에서 라인강을 내려다보며 휴식을 취한 후에는 아우토반에 86을 올렸다. 7500rpm까지 매끄럽게 회전을 올려주는 박서 엔진은 6000rpm을 넘기면서 자극적이고도 화려한 엔진 사운드를 선보였고, 정교한 변속을 자랑하는 6단 자동 변속기는 속도 무제한의 아우토반을 220㎞/h 이상의 속도로 밀어붙였다.

86의 주행은 직진 고속 주행보다는 정교한 코너링에 더 포커싱 된 만큼 아우토반의 고속 주행이 별 재미를 줄 수 있을지 의심되기도 했지만, 중고속 영역에서 두터운 토크로 가속을 부추기는 파워가 고속 주행에서도 기대 이상의 재미를 선사했다. 잠재력이 높은 섀시를 갖춘 86인만큼 과급기 등으로 엔진 파워를 끌어 올린다면 아우토반을 주름잡는 것도 무리한 꿈은 아닐 것이 확실했다.

정글과 같은 아우토반에서 86보다 태생적으로 더 빠른 차들이 다가오면 순순히 1차로를 내 줘야 하기에 수시로 사이드미러로 뒤를 확인할 때면 사이드미러에 비친 뒤 펜더의 양쪽 아치와 앞쪽 낮은 노즈 좌우의 봉긋한 펜더에서 아우토반의 정복자 포르쉐의 향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이 아우토반의 정복자는 86이다.

박기돈기자 nodikar@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