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방송통신장비 업계 고사 위기

방송통신장비 업계가 고사 위기에 처했다. 외산과 경쟁에서 밀리면서 올해 들어 10여개 업체가 줄줄이 도산했다. 코스닥 시장에서 퇴출되거나 심각한 매출 감소에 직면한 기업도 수십개에 이른다. 정부가 거금의 예산을 들여 연구개발(R&D) 지원사업을 펼쳤지만 이마저도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평가다.

31일 한국방송기술산업협회(회장 이일로)에 따르면 협회에 등록된 회원사는 올해 130개로 지난해보다 무려 70개가 줄었다. 이 가운데 2개사가 올해 코스닥 매매정지를 당했다. 또 방송장비사업을 중단한 기업이 12곳, 매출 격감 업체도 22곳에 달했다.

협회 회원 수는 2009년 180개에서 2010년 230개로 정점을 찍은 뒤 2011년 200개, 올해 130개로 수직 하락했다. 한국방송기술산업협회 관계자는 “130개 중에서도 회비를 낼 돈이 없어 사정하는 장비업체도 많다”고 말했다.

방송사 협력 장비업체도 줄줄이 도산했다. KBS는 자사 방송장비 공급업체 50여개 중 5곳이 도산했고 4곳이 업종을 변경했다고 밝혔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통신장비 업계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인터넷폰(IPT)이 주력인 A사는 지난해에 비해 매출이 무려 30%나 수직 하락했다. 코스닥 상장폐지된 기업도 나왔다. 모바일 솔루션 전문기업 인스프리트는 10월 코스닥에서 상장폐지됐다. 막판에 외부에서 40억원을 긴급 수혈받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업계 관계자는 “결국 경쟁사를 인수합병으로 줄여 나가는 `카니발리즘`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방송장비 업계는 정부 지원에도 불구하고 도산이 잇따라 상황은 더 심각하다. 지식경제부와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 2009년부터 2015년까지 5460억원을 투입한 `방송장비산업 고도화 사업`을 진행 중이다. 지경부는 고도화 사업의 일환으로 2009년 19개 국내 방송장비업체를 선정해 140억원의 연구자금을 지원하는 `방송장비산업 원천기술 개발사업`을 실시했다. 그러나 자금을 지원받은 업체 중 6곳만이 방송사와 계약을 맺었다. 매출도 80억원에 그쳤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방송·통신 시장 특성상 중소 장비업체가 성장하기 힘든 구조라고 설명했다. 최성진 서울과기대 교수는 “우리나라 방송사, 통신사는 사고에 예민해 사고가 나면 직원이 시말서를 쓰는 등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잘 알려진 외산 장비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중소업체가 시장에 진출하기 힘들다”며 “개발자는 성능에 대한 피드백을 받으면서 기능을 업그레이드해야 하는데 그런 기회가 없어 실제적으로 국내 장비업체는 주변장비 정도를 개발하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대안은 없는가. 정부가 앞장서 검증받은 국산 장비를 적극 도입하는 방안이 절실하다. 장지영 한국네트워크산업협회 부회장은 “공공기관 정보화 사업 입찰에서 중소 소프트웨어를 도입하면 가산점을 부여한다”며 “이를 벤치마킹해 공공기관 기관장 평가에 네트워크사업에 국산 장비를 도입하면 가산점을 부여하면 보다 실효성 있는 지원정책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내년 설비투자 사업을 조기 집행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라고 입을 모은다. 피오링크의 송승관 대표는 “우리나라는 통신 백본 투자는 어느 정도 이뤄졌지만 가입자망단의 투자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이 부문 투자를 비롯해 내년 사업분을 조기 집행하는 방안을 심도 있게 검토해야 한다”고 말해 정부 차원의 활성화 정책을 주문했다.

이 참에 개발도상국 등 해외에 진출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김광호 서울과기대 교수는 “중소장비 업체들이 해외 개발도상국에 방송장비를 원조하거나 판매하면 여러 가지 측면에서 긍정적인 기업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고 내다봤다.

김시소·

전지연기자 now21@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