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스마트그리드 원격검침인프라(AMI) 구축 사업이 시장성을 배제한 무리한 진행으로 업계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핵심 부품은 국제표준으로 채택됐지만 해외 적용 사례가 없고 정작 국내에서 조차도 외면 받고 있다.
11일 한국전력에 따르면 올해 AMI보급 사업이 성능시험(BMT)을 앞두고 실시한 테스트에서 핵심부품인 전력선통신(PLC)칩 작동오류가 발생해 또 한해를 넘길 조짐이다.
칩 문제로 2년 넘게 사업이 지연됐지만 사업 주체인 한전은 해당 PLC칩만을 고집하고 있다. 수년째 해당 칩을 기반으로 장비와 사업을 준비한 업계 불만은 거세질 수밖에 없다. 국내와는 정반대로 대대수의 해외 국가들은 저·고속 PLC 및 무선통신을 결합한 형태로 AMI 구축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업계는 해마다 칩 문제로 사업의 연속성은 물론 해외 경쟁력도 없는 칩에 더이상 집중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스마트그리드 업계 한 사장은 “세계 어느 나라를 봐도 우리처럼 특정 칩만을 사용하는 곳은 찾기 힘들다”며 “칩 때문에 수년째 고생하고 있는 만큼 이제부터라도 사업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스마트그리드 실현과 전력수급 안정화를 위해 2016년까지 저압고객 1000만호에 AMI를 보급할 방침이다. 2010년 50만호에 AMI를 구축했지만 차기 칩과의 호환성 미비로 감사원의 시정조치를 받았다. 2011년에도 표준화 미비로 사업이 취소됐고 올해 역시 칩 불량으로 해를 넘길 상황이다.
한국형PLC는 2009년 ISO국제표준(IEC12139-1)에 지정됐지만 지금까지 해외 시장에서 적용된 사례는 없다. 반면 미국 마벨의 PLC칩은 국제전기통신연합(ITU)에 채택돼 미국과 체코 등에 적용됐으며 인도네시아·이란·일본 등도 채택을 검토 중이다.
지난달 우즈베키스탄 전력청의 대규모 AMI구축사업에도 국내 기업 10여개가 참여 중이지만 스펙이 맞지 않아 한국형 PLC칩은 채택되지 않았다. 해외 고속PLC칩 시장은 24Mbps속도의 한국형 PLC칩과 달리 200Mbps이상의 제품이 일반적인데다 해외 모든 국가는 저·고속 PLC를 포함해 지그비 등 다양한 무선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또 다른 업계 대표는 “시장 수요와 관계없이 만들어 놨으니 사용하라는 식으로 검증도 안 된 칩을 운영도 안 해보고 사업 하려니 계속해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며 “과거 일은 덮어두고라도 앞으로 투명하게 새판을 짜야 한다”고 말했다.
한전·전기연구원·젤라인 등은 2000년부터 정부의 700억원(업계 추정)의 예산을 받아 PLC칩을 완성시켰다. 이후 4년간 시범사업을 거쳐 2010년부터 구축사업에 착수했지만 실적은 호환이 안 되는 50만호 분이 전부다.
박태준기자 gaiu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