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인사철이 되면 기업 모든 임원들이 마음을 졸인다. 최고정보책임자(CIO)도 예외는 아니다. 2년 안팎이 평균 임기인 국내 CIO들은 연임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비율은 매우 낮다. 10여년 전에 비해 한 회사에서 6년 이상 장수하는 CIO가 급감한 현실을 보면 알 수 있다.
CIO 이후 경력은 다양하다. 승진해서 다른 부서로 자리를 옮기거나 이직하는 경우, 계열 IT자회사 최고경영자(CEO)나 임원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있다. IT벤더 임원으로 옮기거나 창업 등 IT와 무관한 길을 걷는 CIO도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장수하며 정보화 전략을 펼치거나 한 단계 발전된 경력경로를 밟는 CIO는 극히 드물다. 그 이유는 뭘까.
◇CIO하기 힘든 시대
1990년대 시작된 IT열풍은 2000년대 초반 절정에 달했다. 기업들은 앞 다퉈 전사자원관리(ERP), 생산관리시스템(MES) 등 핵심 정보시스템을 도입했다. 경영 전략 수립에 IT가 기본적으로 자리 잡았고 그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CIO 위상도 동시에 높아졌다.
과거 전산부장이 하던 일은 대부분 임원들이 맡게 됐다. 현업이 아닌 IT경력을 갖춘 CIO 비율도 늘어났다. CIO가 최고재무책임자(CFO)나 최고운영책임자(COO)를 거치지 않고 CEO에 직접 보고하는 사례도 생겨났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모바일이 활성화되고 기술이 발달하면서 정보화 영역이 현업과 더욱 밀접해졌지만 대부분 CIO가 여전히 전산시스템 관리자로 치부되고 있다. 오히려 2000년대 초반보다 위상이 더 낮아졌다고 말하는 CIO도 있다.
한 보험사 CIO는 “CIO의 위상이 과거에 비해 오히려 낮아진 거 같다”고 말했다. 그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전 산업군에서 비용절감이 현안으로 떠오르다 보니 CIO의 활동이 그만큼 위축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CIO 하기 참 힘든 시대`라는 게 그의 얘기다.
그의 말처럼 `돈먹는 공룡`으로 치부되던 IT조직이 비용절감 이슈와 맞닥뜨리면서 CIO의 역할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경영층에서 생산성 향상보다는 단순히 비용절감만 우선시하고 있다는 게 CIO들의 하소연이다. CIO를 미화하던 수식어인 `전략가` `기업 혁신 전문가`라는 말은 언제부턴가 요원한 이야기가 돼 버렸다.
2000년대 중후반 이후 차세대 프로젝트 등 대규모 프로젝트가 줄어든 것도 CIO 위상이 높아지지 못한 이유 중 하나다. 기간계 시스템을 전면 재구축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에서 CIO들은 외부 업체와 내부 인력을 조율하는 선장 역할을 했다. 하지만 뚜렷한 정보화 이슈가 없는 상황에서 CIO는 본인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위상 저하는 CIO가 자초했다
비용절감과 대규모 프로젝트 감소가 CIO 위상이 축소된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장수 CIO, 최고경영자(CEO) 등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CIO가 드문 이유는 경영 트렌드와 환경 변화 때문이기도 하다.
필립스전자 김경석 상무(CIO)는 “글로벌 기업을 중심으로 `IT가 핵심 비즈니스는 아니다`라는 인식이 점점 커졌다”며 “이런 상황 때문에 CEO에게 보고를 하던 CIO들의 보고 체계가 다시 CFO를 거치는 식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엔 대부분 시스템 운영과 애플리케이션 개발을 내부(인하우스)에서 책임졌지만 아웃소싱이 활성화되면서 그만큼 CIO와 IT조직의 역할이 축소됐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CIO의 역할도 IT정책 수립으로 한정돼가고 있지만 그마저도 CIO가 아닌 다른 임원이 할 수 있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CIO의 위상 저하는 결국 CIO가 자초한 면이 가장 크다는 분석이다. 운영이 아닌 서비스 측면에서 IT를 바라보고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데 대부분 CIO가 그런 노력이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직함 맨 앞에 `C`자를 달고 있으면서 경영진의 한 사람으로 정책 결정에 뛰어들어야 하지만 결국 그 방안을 찾지 못했다는 얘기다.
CIO는 CEO의 경영 관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CEO가 IT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놓아야 한다. 정보화에 대한 마인드가 충분한 CEO라면 CIO가 인정받기가 훨씬 용이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CEO 눈에 비친 CIO와 전산조직은 `외딴 섬`에 불과하다는 게 CIO 출신 비즈니스 임원들의 얘기다. 결국 임기 만료를 앞둔 CIO는 연임이나 승진이 아닌 이직과 창업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불경기인데다 예전과 달리 공급업계에서도 투명성을 강조하고 있어 업계로 이직하기도 쉽지 않다. 50대 전후로 퇴직을 하게 되면 창업을 하든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는데 어떤 일을 하든지 다 초보라 실패할 확률이 커서 답답할 뿐이다.” 한 CIO의 하소연에 그들의 현재 위상이 잘 드러난다.
◇비즈니스 감각을 갖춰라
CIO의 상황이 무조건 나빠지지만은 않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김병철 대신증권 전무는 “금융권, 특히 증권업은 장치산업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오히려 과거보다 CIO와 IT의 역할이 확대됐다”며 “IT감독규정이 강화되면서 임원급 최고정보보안책임자(CISO) 직제가 생겨 IT부문에서의 기회도 그만큼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증권업 등 특정 분야를 제외한 대부분 산업군에서 CIO들의 여정은 녹록하지가 않은 게 사실이다. 장수 CIO와 OB CIO들은 CIO가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경영자의 시각`을 갖춰야 한다고 충고한다. 전문성을 인정받는 것은 기본이고 비즈니스 감각을 갖춘 IT전문가로 변신할 때 성공적인 경력경로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CIO로서 가장 성공적인 경력경로 모델로 평가받고 있는 이강태 BC카드 사장은 최근 전자신문과 인터뷰를 통해 “구두를 잘 만들려면 가죽을 잘 아는 사람보다는 사람의 발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CIO 역시 IT보다 회사 비즈니스를 더 잘 알아야 정보화의 가치를 임직원에게 인식시킬 수 있고 스스로 발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10월 언스트앤영이 글로벌 CIO와 CEO, COO, CFO 34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주요 임원들은 CIO가 비즈니스 감각을 동시에 갖춰야 한다고 응답했다. 이 조사에서 임원들은 비즈니스 성과나 도전과제 해결을 위한 논의에서 CIO의 역할을 크지 않다고 답했으며, 이는 비즈니스 감각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비즈니스를 잘 이해하려면 IT조직 외에 다양한 조직원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 기업에서 IT단독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다양한 부서, 산업군의 사람들과 인맥을 쌓아야 한다.
전문 CIO로서 장수하는 것 자체도 행복한 일이지만 경영자를 목표로 미래를 준비한다면 조직 운영과 이익 극대화를 위한 안목을 키워야 한다. 경영학석사(MBA)나 CEO 과정을 이수하는 것도 도움이 되며 부단하게 관련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
한 공공기관 CIO는 “CIO(Chief information Officer)에서의 `I`에 단순한 정보(Information)가 아니라 가치정보(Intelligence), 창조혁신(Innovation), 투자(Investment)의 의미를 담는 전문가로 변신할 때 CIO는 그 다음 단계로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CIO의 위상이 낮아지는 이유
안호천기자 hca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