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안보는 국가 경제활동의 토대이자 사회 안전을 좌우하는 요소다. 산업구조, 나아가 국민의 에너지소비 습관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개념으로 에너지안보 확충을 위해서는 물리적·심리적인 변화가 동반되고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 국민 동의 등 다양한 각도의 접근과 노력도 필요하다. 이와 같은 이유로 미국, 중국 등 에너지 다소비 국가뿐만 아니라 세계 대다수 국가에서는 이미 에너지 안보를 국정 운영에 있어 핵심 어젠다로 삼고 국가 경영에 반영하고 있다. 2기 오바마 정부가 출범한 미국은 셰일가스 생산을 기반으로 에너지 자급률 제고에 주력하고 있고 중국은 시진핑 주도하에 신재생에너지 확대, 화석연료 확보에 과감한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우리나라 또한 최근 에너지 자급률 제고, 소비구조 개선 등을 통해 에너지안보 강화를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전문가들은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을 냉정하게 들여다보고 이를 바탕으로 전략적인 에너지 안보를 수립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조성봉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는 “에너지안보 확립은 곧 국가 성장기반 구축과 같다”며 “국제 정세뿐만 아니라 국내 에너지 소비구조, 국민 의식 등도 면밀히 들여다 볼 수 있어야 에너지 안보를 확립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실 비껴간 요금체계 `에너지 안보` 해친다
왜곡된 전기요금 체계 개선은 우리나라 에너지안보 확립을 위해 우선 해결해야 할 과제다.
우리나라 전기요금은 지난 2002년부터 2011년까지 10년간 21% 상승하는데 그쳤다. 같은 기간 도시가스 72%, 등유 145%, 경유가 165% 상승한 것과 비교하면 사실상 제자리다.
1984년 ㎾/h당 67원이었던 전기요금은 2008년 89원에 머물렀다. 특히 전체 전력소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산업용 요금은 2003년부터 2010년까지 13.7% 상승했는데 이는 OECD국가 최저 수준이다. 같은 기간 일본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26.2%, 영국과 프랑스는 각각 120%, 135% 상승했다.
반면 전력 소비는 63% 증가했다. 이 시기에 일반소비자의 도시가스 소비는 15% 증가하는데 그쳤고 경유, 등유 사용은 감소세로 돌아섰다. KDI에 따르면 전력 대체에 따른 국가적 손실이 연간 1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 1인당 전력소비량은 일본, 프랑스 등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의 두 배인 국가를 앞질렀다.
한국전력의 재무상황도 악화됐다. 2008년 이후 한국전력의 누적적자는 10조원에 달한다. 발전기업 또한 연료비 증가와 신재생에너지 의무할당제(RPS) 도입 등으로 발전비용 증가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문승일 서울대학교 교수는 “우리나라 전력수요는 포화돼서 내려가야 하는 상황인데 반대로 올라가고 있다”며 “전기는 생수에 비교할 정도로 고품질의 에너지원인데 생수가 한강물보다 싼 것이 지금의 상황”이라고 말했다.
◇전력 수급 불균형 언제까지
지난 2011년 9월 15일. 전국 각지에서 네 시간 남짓 발생한 정전사태로 우리나라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전체 신고건수 62건, 신고금액 610억원이라는 피해규모보다 안정성에 관한 세계 최고라고 자부했던 우리나라 전력공급능력의 신뢰성에 금이 간 것이 더 큰 문제로 지적됐다.
전기가 곧 모든 경제활동의 원동력인 지금, 예상치 못한 정전은 곧 국가적인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2003년 북미 동북부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정전으로 5500만명의 시민이 전기 공급을 받지 못해 불편을 겪었고 2010년 일본 도시바는 0.07초의 정전으로 100억엔의 손실을 입었다.
9.15 정전 당시 대다수 전문가들은 수요 예측의 실패를 정전 발생의 원인으로 돌렸다. 더불어 전력 거래소의 계통운영 분리, 발전 회사의 비리, 전력요금 왜곡 등을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9.15 정전 이후 지금까지 이에 대한 개선은 미미하기만 하다.
여전히 폭염과 한파로 인한 전력수요 증가와 이로 인한 예비율 감소가 되풀이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예비율은 안정적인 전력수급이 가능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 대체적 인식이다.
전체 발전량의 32%를 차지하는 원자력발전소가 고장, 정비로 가동 중단되면서 당장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도 전력 공급 부족의 한 단면이다.
향후 전력 수요는 매년 5% 이상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노후 발전설비 폐기와 신규 원전 설립 반대 여론으로 발전 용량 추가가 어려워지면 전력난은 고착화될 우려도 있다. 대안으로 신재생에너지 보급 확대를 주장할 수 있지만 태양광·풍력발전에 필요한 부지, 비용을 감안하면 신재생에너지 비중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수요예측 두 번 실패 없어야
전력난 해결의 열쇠는 수요예측이다. 정확한 수요예측이 곧 정확한 공급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연중 최대 전력수요는 1990년 1만7252㎿, 2000년 4만1007㎿, 2009년 6만6797㎿로 연평균 5% 이상 급증했다. 반면 같은 기간 발전설비용량은 2만1021㎿, 4만8451㎿, 7만3470㎿로 증가하는데 그쳤다. 수요예측에 실패한 결과다.
4차에 걸친 전력수급계획에서 2009년~2011년에 대한 수요 증가율 전망은 2%대를 넘어서지 않았다. 2006년, 3차 전력수급계획에서는 설비 예비율이 하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공급 계획을 오히려 축소하기도 했다.
이는 기후변화, 국민 생활습관 등을 전혀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난방수요는 지난 2006년 18.6%에서 2011년 25.4%로 급증했다. 이상저온 현상이 점차 심해지는 우리나라 기후와 무관하지 않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지난해 `발간한 동절기 전력난 원인과 대책` 보고서에서 전력의 계절성 수요가 확대되고 있고 이에 대한 예측이 미흡했다고 지적했다.
상업용 수요도 빠르게 증가했다. 서비스 산업 발달로 상업용 전력 수요는 연평균 11.4% 증가했는데 이는 산업·주택부문 증가율의 두 배에 달하는 수치다.
여기에 새로운 IT기기 보급 증가로 신규 전력수요가 발생하고 있고 소득 증가와 삶의 질 향상 등으로 전력 의존도 또한 지속 상승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전력 수요 변화를 전력공급계획의 기반이 되는 수요예측에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고 현재 전력난을 초래했다. 더욱이 계획한 발전소 건설도 지연돼 2009년까지 발전소 건설 계획 대비 실제 이행률이 80%에 그치는 등 수요증가에 비해 공급 능력 확대가 미흡했다.
근시안적 해결방안으로 단기간에 건설이 가능한 복합화력발전소를 증설하면서 기저발전 부족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기전발전 부족은 전력뿐만 아니라 국제 유가에 대한 민감도를 높여 물가 상승요인으로도 작용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저렴하고 안정적인 전력공급을 가능하도록 기저발전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서는 수요패턴 변화를 반영한 장기적인 수요예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