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세 이노디자인 회장
◇아이리버와의 첫 만남
2001년 12월 생소한 이름의 회사 대표가 미국에 있는 나를 찾아왔다.
나의 책 《12억 짜리 냅킨 한 장》을 읽고 찾아온 그의 파트너 제안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이었다. 세계 시장을 겨냥 한만큼 디자인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지만, 중소기업이기 때문에 당장 디자인 요금을 지불할 큰돈이 없다고 말했다. 대신 우리에게 디자인 독점권을 주고, 판매액의 일정부분을 디자인 비용으로써 로열티로 제공하기로 제안했다.
![[김영세의 디자인스토리]<3> Design First, 디자인 경영을 위한 첫 걸음](https://img.etnews.com/cms/uploadfiles/afieldfile/2013/01/25/383775_20130125134529_663_0001.jpg)
그 회사는 디자인 사무실로 직접 찾아와서 기업이 추구하는 비전과 현재 자사가 갖고 있는 기술력을 적극적으로 피력하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달리 생각한다면 이것은 디자인의 위력을 세상에 알릴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나는 함께 모험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좋은 기술력을 가진 작은 기업의 손을 잡았다. 그것이 디자이너로서 나의 이름을 보다 넓은 소비자에게 알려준 아이리버와의 만남이었다.
가전 시장은 당시만 해도 기능을 우선했다. 기능을 실현하기 위한 전자 기판과 틀, 그것을 조작하기 위한 버튼 외에 디자인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지금 한국의 산업을 이끌고 있는 기업들이 선진국의 주문자위탁생산(OEM)에서 출발해 그것을 발전시키며 성장한 것을 생각하면 그런 흐름이 충분히 이해되기도 한다. 기술이 먼저 나오면 디자인은 그것을 포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많은 기업이 기술 개발에 비해 디자인은 전혀 투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말도 안 되는 디자인”이 만든 성공
시장에는 천편일률적 사각형의 MP3플레이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플래시 메모리 타입이라서 가볍다는 신기술의 장점을 극대화기로 마음먹었다. 한 손에 쏙 들어오고 많은 조작 버튼을 과감히 하나의 조그 버튼으로 단순화했다. 대신 삼각기둥 형태의 디자인을 파트너에게 전달했다. 옆에 나란히 배열했던 일반적인 부품 구성을 적층식으로 쌓으면 기능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사용은 더욱 간편할 것이라는 의도였다.
내가 기업 측에 요구한 디자인을 그대로 제품으로 만들어내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엔지니어들은 `말도 안되는 디자인`이라며 전자기판이 들어갈 공간을 1㎜라도 늘려달라며 불만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들도 나의 의도와 디자인의 타당성에 동의했다, 프리즘 형태의 MP3 플레이어는 개발자들의 뛰어난 기술력과 자기혁신으로 나의 스케치 그대로 두 회사가 함께한 회의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샘플을 보고 “드디어 만들어냈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 경영진의 밝은 얼굴이 아직도 선명하다.
디자인 회사를 단순 용역이 아닌 파트너로 받아들인 결과는 생각 이상이었다. 우리는 미국 최대 전자제품 유통사인 `베스트바이(Best Buy)`를 통해 미국 시장 진입을 테스트 해봤다. 초기 모델은 베스트바이로부터 6개월간 독점 판매권이라는 엄청난 제안 받았다. 100만개 넘는 매출로 세계 플래시 메모리 타입 MP3플레이어 시장 점유율 1위에 올랐다. 제작기업은 물론 나와 이노디자인의 이름을 세상에 알려주었다. 이 제품이 바로 독특한 형태로 인해 `프리즘`이라고 불렸던 레인콤의 iFP-100시리즈다.
프리즘의 성공 사례는 타기업에게는 제품 기획 단계부터 디자인의 중요성을 다시 보게 했다. 주요 소비층이었던 학생들에게서는 디자이너의 꿈을 꾸는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이노디자인과의 만남으로 불과 매출 80억의 벤처 회사는 매출액은 수십 배로 증가했다. 무수한 업체들을 제치고 몇년간 부동의 업계 1위를 유지하며 그 후 몇년간 두 회사의 파트너쉽은 계속되었다.
양사의 디자인 협력이 가져온 것은 수익만이 아니었다. 목에 걸었던 프리즘을 디지털 카메라로 오인 받았던 우연한 경험에서 아이디어를 착안해 새로운 제품을 내놨다. MP3 플레이어로서는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를 탑재한 후속 모델 `프리즘 아이` iFP-1000은 2005년 IDEA상 소비재 부문 은상을 수상하는 기쁨을 제작사와 나에게 안겨주기도 했다.
◇디자인 경영의 대표였던 `미스터 애니콜`
삼성전자 이기태 전 부회장도 디자인에 대한 생각이 트여있는 사람이었다. 이 전 부회장은 오랜 만남과 깊은 대화를 통해 이노와 함께 일반 가전제품 30~40개와 휴대폰 관련 특허만 70여 개를 내놓았다. 당시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사장이었던 그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디지털 기기들에 관한 자신의 포부를 “이 세상을 손 안에 넣겠다”며 한 마디로 밝혔다.
나 또한 어떤 기기든지 손 안에 들어갈 정도로 작고 가벼웠으면 좋겠다는 이 전 부회장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우리는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만나면서 앞으로 만들어갈 제품의 디자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엔지니어 출신이었던 이 전 부회장은 디자인에 대한 전문적 경험이나 기술은 없었다.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들을 스케치나 시각화된 방법으로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 느낌을 최대한 설명했다. 오랜 시간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어느 순간부터는 서로 마음이 통했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기술 기반의 아이디어로 내 머릿속에도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다.
어느 날 식사 자리에서 이 전 부회장이 자신의 옆에 있는 노트북을 가리키며 말했다.
“노트북도 이제 손 안에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니야?”
순간 나는 강연에 동행하는 직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업이나 대학에 강연을 다닐 때 나는 보통 홍보를 담당하는 여자 스태프와 동행을 한다. 그 때 그녀가 들고 있는 노트북이 너무 무거워 보였다. 한 손에는 노트북을 한 손에는 핸드백을 들고 다니는 직원의 모습을 볼 때마다 불편하고 안쓰럽게 느껴졌다. 이 전 부회장이 그런 말을 하니 퍼뜩 내 머릿속에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노트북을 샌드위치처럼 겹치게 접을 수도 있겠다!`
그 후 나는 샌드위치처럼 접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노트북을 디자인하는 데 주력했다.
우선 크기가 큰 키보드는 반으로 접고 그 사이에 모니터가 들어가는,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형식의 노트북을 스케치로 옮겼다. 이 전 부회장에게 보여주자 그는 매우 흡족해하며 불같은 추진력으로 상품화를 이루었다. 지금처럼 통신이 4세대까지 발달하고 대중적인 터치스크린 인터페이스가 나온 시점에도 사람의 손의 크기는 줄어들지 않아 키보드는 기술적 숙제로 남겨져있다.
당시 통신사 와이브로 모델로 출시된 당시의 SPH-P9000은 모바일 컴퓨터의 혁신적 터닝포인트였다. 디자이너로서 이 전 부회장처럼 훌륭한 비지니스 파트너를 두었던 것은 내게 정말로 큰 행운이었다. 난 그를 `디자인 경영 마인드`를 확실하게 보여준 창의적 경영인의 대표 모델로 기억한다.
◇디자인 경영의 중요성, Design First
오늘날 전 세계의 기술 및 부품이 표준화되어 디지털 제품 시장의 진입 장벽은 점점 낮아지고있다. 기술력이 없어도 표준화된 부품만 사오면 제품 생산이 가능한 시대다. 중국 시장에서는 언뜻 봐서는 구별조차 되지 않는 복제품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나는 디자인이야말로 이를 타파할 수 있는 기업의 핵심 역량이라고 늘 이야기하곤 한다. 기술이 공장과 연구소에서 태어난다면 디자인은 바로 시장과 소비자들에게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디지털 라이프스타일` 시대에 들어와서는 과거보다 디자인 경쟁이 더욱 치열해진 것도 사실이다.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좀더 나은 디자인 상품을 내놓기 때문에 디지털 관련 신제품의 라이프 사이클도 점점 짧아져간다. 프리즘 이후 나는 직관으로 디자인을 한 후에 제작사와의 협력을 통해 제품을 만들어나가는 `디자인 퍼스트(Design First) 모델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다수의 혁신적인 제품이 나왔다. 끊임없는 차이를 만드는 도전만이 내가 과거 경험했던 것과 같은 상상할 수 없는 성공을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