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에서 CI(Corporate Identity)는 `전 사적(全 社的)`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단순히 임직원의 모임이 아닌 큰 사회 유기체로서 기업은 단체의 성격을 집약적으로 잘 표현하는 하나의 상징물이 필요하다. 기업 아이덴티티의 적절한 활용은 안으로는 구성원들에게 소속감을 제공하고, 회원 및 관계사 등 밖으로는 회사 이미지와 관계성을 높인다.
그런데 CI의 활용은 말처럼 단순하지 않다. 기업이 크면 크는 만큼 그에 관련된 직원도 많아질 뿐더러 업무량이 늘어나면 피치 못하게 외부 조달도 필요하다. 이는 CI에 관여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뜻이고, 그들 모두가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게 만드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디자인 매뉴얼이다.
1982년 시중 은행들이 공동 출자해 은행신용카드협회로 시작한 우리나라 신용카드 업계의 대표적 기업 `BC`는 그 역사만큼 브랜드도 오래됐다. 1989년부터 본격적 브랜드화에 쓰인 `BC`의 의미는 `Bank & Credit(은행, 신용)`며 지금의 빨간색 구에 `BC` 서체를 넣은 CI가 쓰인 것도 그 때부터다. 이후 세 번의 리뉴얼을 거쳐 시그니처를 생략하고 오로지 빨간 원형만을 남긴 CI로 리뉴얼된 것이 2009년이었다.
CI를 변경한다는 것은 기업의 정체성을 바꾸는 작업이다. BC 카드회사는 오랜 기간 쌓아온 고유 이미지를 더욱 정립해 브랜드 자산을 간결하게 강화하기 바랐다. 마치 여성이 긴 머리를 짧게 자르고 새로운 기분으로 자신의 인생을 새로운 방향으로 개척해나가는 것과 비슷하다. 그녀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지만, 바뀐 헤어 스타일에 맞는 말투, 화장, 코디 등이 필요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능력 있는 디자이너다.
디자인 혁명으로 이름 붙인 이러한 `스타일링`을 위해 디자이너가 직접 일선으로 뛰어들었다. 고객을 직접 상대하는 직원에게서 평소 회사의 디자인 관련 상품들의 문제점과 그들이 생각하는 기업의 비전을 들었다. 각종 인쇄물과 상품을 수집 분석하고, 사옥을 구석구석 살폈다. 영업점의 문제를 파악하고, 그들의 전략을 듣고 각 분야에 디자인 솔루션을 제공했다.
경영진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디자인 경영 사례를 들며 새로운 방식의 기업 운영 방법까지 제시했다. 고객이 느끼는 기업 이미지와 기업 상품을 바탕으로 추구하는 가치 등도 조사했다. 고객이 느끼는 것과 기업이 보여주려는 기업 정체성 조율도 진행했다. CI도 디자인 혁명의 일환으로 간결하고 명확하게 표현해 대표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리뉴얼됐다.
이후 이노는 새로운 CI를 활용하는 수백 가지의 애플리케이션을 담은 디자인 매뉴얼을 해당 카드 디자인팀에 전달했다. 자그마치 세 권의 책에 카드, 비주얼, 스토어, 애드버타이징의 네 가지 영역으로 나눠 방대한 내용을 담았다. 심벌과 시그니처 서체의 활용 규정은 물론이고 그래픽 모티브 활용, 리플렛과 포스터 레이아웃, 명함, 편지지, 봉투, 사내용 배너, 배지, 사원증, 각종 사인, 캘린더, 노트, 사은용 시계 등 브랜드 상품, 영수증이나 유니폼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애플리케이션`이라고 부르는 디자인 요소는 사내 디자인 팀이 외부 회사와 일할 때 지침서 역할을 한다.
심벌의 최소 규정인 지름 7㎜에까지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담은 애플리케이션은 디자인에 대한 가이드라인이다. 디자인 매뉴얼은 통일감을 해치는 컬러 시스템, 서체, 콘텐츠 등을 막아 CI를 견고히 하는 역할을 한다. 판단은 회사 역할이지만, 매뉴얼 내용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점진적으로 수정, 보완돼야 한다. 이때 반드시 매뉴얼 관리 부서를 중심으로 협의체를 구성해 면밀한 연구, 검토를 거쳐 결정해야 한다. 이는 회사의 CI가 개인의 직관이나 충동으로 함부로 변경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이때 개인에는 회사 최고경영자인 회장까지도 포함된다. “짐이 곧 회사”인 루이 14세 같은 회장이 아니라면 말이다.
브랜드는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된 이미지며 문화다. 이미지와 문화는 기업이 히트 상품 몇 개를 냈다고 단숨에 생기지 않는다. 브랜드를 키우려면 숲을 키우겠다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디자이너는 시류에 휘말리지 않는 브랜드의 정체성을 찾아내고, 그것을 일관되게 적용해야 한다. 눈앞의 작은 이익이나 트렌드 때문에 정체성을 흔들고, 애써 키운 브랜드 자산 가치를 한번에 폐기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은 흔히 벌어진다.
다른 디자인을 보고 자기 정체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직시해 자기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차별화가 아니라 자기 동일성 찾기다. 어떤 브랜드가 차별화만 좇는다면 영원히 뜨내기 브랜드를 면치 못한다. 그동안 우리 기업 문화,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정치 문화, 근본적으로 생활 문화 자체가 뜨내기 같아서 당장 돈이 안 되는 정체성 찾기는 사치로 여겼다.
“디자이너, 당신에게 돈을 지불했으니 나에게 이익을 주시오. 지금 당장.”
하지만 그런 문화는 성장에 한계가 있고, 우리나라가 딱 그 한계에 와 있다. 지금까지 엇비슷하게, 그럴듯하게 만드는 감각으로 여기까지 왔지만, 그 실력으로 진짜 고수들과 겨루는 메이저리그는 역부족이다.
디자인 매뉴얼은 한 기업에 관한 철두철미한 이해와 연구 없이는 만들어낼 수 없다. 기업의 브랜드를 나타낼 수 있는 모든 요소에 삽입해 고객이 무심코 만나는 아주 작은 요소에서도 기업의 비전을 느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들이는 시간과 노력은 말로 다 할 수도 없다. 다년간의 노하우로 기업 이미지에 세련미를 더해주는 디자이너들은 또 어떤가. 이러한 `정신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은 아직도 과거 산업시대에 발이 묶여 있다.
디자이너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잘 살펴야 한다. 그들이 진정으로 기업을 이해하고 미처 알지 못했던 기업의 매력을 끌어올려줄 수 있는 스타일리스트인지. 아니면 세계적 무대의 레드카펫에서 “디자이너가 안티”라는 이야기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김영세 이노디자인 회장
-
김명희 기자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