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돈오점수와 노벨상

`돈오점수(頓悟漸修)`, 불교에서 돈오(頓悟), 즉 문득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점진적 수행 단계가 따른다는 말이다.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읽었던 원효의 해골바가지 이야기 한 토막. 당나라에 불교를 배우러 떠난 원효와 의상은 어느 산골 폐가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새벽에 극심한 갈증을 느낀 원효는 어두운 실내에서 우연찮게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을 마시고, 날이 밝자 해골 속 구더기를 본 후 깨달음을 얻는다. 원효는 발길을 돌려 신라로 돌아가 대중 속에서 불심을 전파했다.

의상은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화엄종을 창시했다. 원효와 의상 모두 후세에 최고 명승으로 기록된다.

액면으로 보면 원효가 의상보다 더 훌륭해 보인다. 극적인 상황에서 의상보다 더 빨리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쉽게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깨달음이라는 궁극의 경지는 선후의 기준을 초월해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원효의 속성 깨달음은 재수가 좋아 얻은 게 아니다. 이전부터 중생의 삶을 고민하며 득도를 향해 끊임없이 정진해온 수행 과정을 바탕에 둔다. 의상의 불교 유학 역시 말이 유학이지 깨달음을 향한 고행이었다.

21세기는 초스피드 시대다. 모든 게 빠르게 변한다. 발 빠른 자가 승리자가 될 확률이 높다.

대한민국은 빠르기라면 첫손에 꼽힌다. 우리의 산업화 진척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그럼에도 우리가 아직까지 이뤄내지 못한 것이 하나 있다. 노벨과학상 수상이다.

위대한 역사적 성과는 한순간의 요행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노벨상 수상 또한 꾸준히 쌓아 올린 탄탄한 기초과학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깨달음을 얻고자 오랜 기간 수행하는 것처럼 꾸준히 자유롭게 연구할 기초과학 연구 지원 환경이 갖춰지면 노벨상은 문득 다가올 것이다.

부산=임동식기자 dsl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