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127>외환위기 소방수`정보화`

“삐-”

어둠 속에 깊이 잠든 경기도 일산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 자택.

새벽 4시 30분이면 어김없이 한 장의 팩스가 날아들었다. 외환거래 내역과 보유액을 기록한 외환일보(外換日報)였다. 이 팩스는 즉시 김 대통령 당선자 침실로 전달됐다. 김 당선인은 하루 일과를 외환일보를 읽는 일로 시작했다.

1997년 12월 27일.

김 당선인은 단군이래 최대 경제위기라는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날 비상경제대책위원회 기획단을 출범시켜 날마다 외환일보를 팩스로 보고받았다. 기획단이 작성한 일보는 김용환 비대위원장(재무부 장관, 자민련 부총재 역임, 새누리당 상임고문)을 거쳐 하루도 거르지 않고 김 당선인의 새벽잠을 깨웠다.

당시 기획단장은 이헌재 씨(금융감독위원장,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역임)였다.

서울대 법대를 수석 입학하고 1962년 행정고시에 수석 합격한 후 6년 만에 재무부 과장으로 승진할 정도로 잘 나갔다. 그는 1979년 공직에서 물러나 대우그룹 임원, 증권관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김용환 비대위원장의 요청으로 기획단장을 맡아 외환위기 극복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나중에 `구조조정의 전도사` `외환 방패`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회고록 `위기를 쏘다`에서 당시 급박했던 상황에 대해 “밤새 애를 태우며 외환일보를 기다리는 대통령 당선인. 그가 맡게 될 풍전등화의 나라. 이런 이야기가 관료사회에 퍼지면서 비대위의 위상이 굳건해졌다. `대통령 당선인이 비대위의 보고서로 새벽을 시작한다`가 정설이 됐다”고 증언했다.

당시 한국경제는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처지였다. IMF 외환위기라는 듣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초유의 사태를 맞아 한국 경제는 천길 벼랑 끝에 섰다.

김대중 정부는 국정의 최우선 과제를 외환위기 극복에 두고 외환관리에 총력을 기울였다.

김 대통령은 이 무렵 외환위기 해결사는 `정보화`라고 확신했다.

정보화로 기업과 행정의 구조개혁을 추진하고 텅 빈 외환금고를 채우겠다는 구상이었다.

이런 구상은 즉시 정보통신부 정책에 반영됐다.

정보통신부는 4월 7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국내 통신업체의 외국인 지분한도를 33%에서 49%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외국자본 유치를 위한 통신정책 변경이었다.

배순훈 정통부 장관의 회고.

“장관 재임 시 가장 크게 문제가 된 것 가운데 하나가 외국인들이 가질 수 있는 한국 통신업체 지분 한도를 33%에서 49%로 확대하는 일이었다. 금융이 개방된 마당에 국내 통신업체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외국 자금을 보다 원할하게 끌어들일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이 정책은 내가 혼자서 추진한 게 아니라 김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사안이었다. 김 대통령이 국민회의와 자민련 두 여당 대표에게 지시하는 것을 내가 직접 들었다. 나는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으로 알고 언제까지 법안을 고치겠노라고 발표했다.”

김 대통령의 `지식 정보화 강국` 의지는 강력했다.

김 대통령은 배 장관에게 각별한 신임을 표시했고 국무회의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지식과 정보가 경쟁력의 원천”이라고 역설했다.

김 대통령이 정보화를 국정 핵심 전략으로 제시하자 부처마다 정보화를 경쟁적으로 추진했다.

김정길 행정자치부 장관(청와대 정무수석, 대한체육회장 역임)은 그해 4월 7일 행자부 인터넷 홈페이지에 `장관과의 대화방`을 처음 개설했다. 공무원과 국민이 장관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현장 민원, 정책 건의, 개선사항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대화방에 올리도록 했다. 대화방은 김 장관만 볼 수 있게 했다.

김 장관의 회고.

“많은 분이 다양하고 솔직한 의견을 보내왔다. 나는 날마다 국민과 공무원들이 고충과 제안을 직접 챙겨 개혁 프로그램과 정책 아이디어에 적극 반영했다.”

교육부도 전국 학교에 컴퓨터를 보급하고 학생과 교사들에게 인터넷을 교육하는 학교정보화에 박차를 가했다.

이해찬 교육부 장관(국무총리, 민주통합당 대표 역임, 현 국회의원)의 증언.

“나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총괄간사에 이어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됐는데 지식정보화 사회가 요구하는 창의적 인재양성에 대해 김 대통령과 많은 논의를 했다.”

1998년 5월 21일.

김 대통령은 이날 오전 10시부터 청와대 2층 집현실에서 제1차 정보화전략회의를 주재했다. 회의는 정보화 촉진과 정보통신산업 육성으로 단기에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장기적로는 21세기 지식정보사회의 기틀을 마련하겠다는 정부의 실천의지를 다짐하는 자리였다

김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면 금융기업 구조조정과 정부 구조개혁이 최우선 과제”라며 “조직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정보기술을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회의를 일방적 지시가 아닌 현안 정책과제를 참석자들과 토론방식으로 진행했다.

이날 회의에는 정부측에서 김종필 국무총리서리(국무총리, 자민련 총재 역임)와 이규성 재정경제부 장관(현 코람코자산신탁 회장), 진념 기획예산위원장(경제부총리 역임, 현 전북대 석좌교수), 배순훈 정보통신부 장관, 김정길 행정자치부 장관, 강봉균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정통부 장관, 재정경제부 장관 역임, 현 군산대 석좌교수), 김태동 청와대 경제수석(현 성균관대 명예교수), 정해주 총리 국무조정실장(통상산업부 장관 역임, 현 한국화학융합시험연구원 이사장)이 참석했다. 금융계에서는 심훈 한국은행 부총재(금융통화위원, 부산은행장 역임)가 학계에서는 안문석 고려대 정책대학원장(현 고려대 명예교수)과 김효석 중앙대 경영대학장(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 역임)이 참석했다.

관련 단체에서는 이계철 한국통신사업자연합회장(정통부 차관, KT사장, 방송통신위원장 역임), 유기범 한국통신산업협회장(대우통신 사장 역임), 남궁석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장(작고, 정통부 장관, 국회사무총장 역임), 김을재 정보통신중소기업협회장(현 금양통신 회장), 업계에서 최인학 모토로라반도체통신 부회장(한국외국기업협회장 역임), 김동연 텔슨전자 사장, 정영희 소프트맥스 사장(한국IT여성벤처기업인협회 부회장 역임) 등이 자리를 같이 했다.

회의는 △배순훈 정통부 장관이 경제회생을 위한 정보화 촉진 및 정보통신산업 육성 방안 △김정길 행안부 장관이 행정 생산성과 서비스 제고를 위한 전자정부 구현 방안 △진념 기획예산위원장이 공공 부문 정보자원 관리 개선을 위한 통합, 연계, 외부 위탁 방안을 7분간씩 보고했다. 이어 김 대통령 주재로 정보화를 통한 구조개혁 방안에 대해 참석자들이 40분간 토론했다.

배순훈 정통부 장관은 보고에서 “국민의 정부 정보화 추진 방향은 당면한 국가 최대 현안인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고 21세게 지식정보화사회 기틀을 다지는 일”이라며 “이를 위해 국가전략으로 정보화를 적극 추진해 강력한 구조개혁을 이룩하고 정보통신산업 육성으로 튼튼한 경제 기반을 확립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배 장관은 이어 “정부 구조조정을 뒷받침하고 예산 절감과 생산성 향상을 위해 정보화 투자를 확대하고 정보 활용 체계를 개선하겠다”면서 “향후 5년간 정보통신 부문에서 44만명의 신규 고용이 창출할 수 있게 지원하고 외국인 투자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정보통신 분야에 올해부터 내년까지 42억달러의 외자 유치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배 장관은 “국내 통신사업자와 선진 각국 통신사업자와의 전략적 제휴를 확대하겠다”면서 “이동통신단말기, 고속모뎀, 평판디스크플레이, 광디스크드라이브, 위성방송 수신 셋톱박스, 인텔리전트TV 등을 수출 유망품목으로 선정, 중점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배 장관은 또 “세계에서 컴퓨터를 제일 잘 쓰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유아부터 노령자를 대상으로 2002년까지 2500만명에게 정보화교육을 실시하겠다”고 보고했다.

김정길 행자부 장관은 “중앙 및 지자체의 정보화를 보다 체계적,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정보화 책임관(CIO)` 제도를 7월까지 도입하고, 중앙부처는 차관이나 기획관리실장을 CIO로 임명하며, CIO를 보좌하는 전문가를 계약직으로 채용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김 장관은 “올해 전자공문서의 표준을 설정, 내년부터 생산되는 행정문서는 모두 디지털화하고 올해 말까지 전 중앙행정기관의 홈페이지 운영을 개선해 국민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즉시 제공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진념 기획예산위원회 위원장은 “공공 부문 정보자원 관리를 위한 개선방안으로 올해 3분기 중 △4개 사회보험 통합정보 시스템 구축 △행자부, 건교부, 대법원 부동산정보 연계 운영 △체신금융 전산 시스템 외부위탁 추진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한국전산원에 `국가정보화센터`(가칭)를 운영하겠다”고 보고했다.

진 위원장은 “의료보험, 고용보험, 연금보험, 산재보험 등 4대 사회보험의 정보 시스템이 올해 3분기 중 1개 정보 시스템으로 통합하면 2000년 중반부터는 주소지 변경 등 자격변동 시 본인이나 대리인이 인근 사회보험사무소 중 한 군데만 가면 되고 PC 이용도 가능해진다”고 밝혔다.

진 위원장은 “5개 부처 7개 사회보험기관에서 분산 운영하고 있는 4대 사회보험의 정보 시스템을 통합하면 전산 예산이 연간 1059억원에서 725억원으로 절감되고 전산인력도 현행 1141명에서 대폭 줄어든다”고 설명했다.

진념 위원장의 증언.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공공개혁 부문이었다. 민간은 구구조정으로 몸살을 앓았고 국민의 고통도 심각한 상황에서 공무원도 고통을 분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공공개혁을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공무원 봉급 10% 삭감이었다. 그렇게 확보한 자금으로 공공근로 작업, 실업자 생계보호, 생활안정자금 융자에 충당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