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50년 전인 1963년, 우리나라 광부와 간호사의 독일 파견은 한·독 협력의 물꼬를 텄다. 비록 당시 경제 수준 차이는 엄청났지만, 두 나라는 광부·간호사 파독을 통해 많은 도움을 주고 받았다.
우리나라는 그 즈음 독일로부터 1억5000만마르크(약 3500만달러)의 차관을 얻어 산업을 일구는 데 투입했다. 당시 독일로 간 광부와 간호사 수천명이 우리나라에 송금한 돈도 경제에 큰 보탬이 됐다. 60년대 이들이 독일에서 받는 월급은 우리나라에서 받는 월급의 10배에 달하는 수준. 파독 경쟁률도 높았던 이유다.
한국만 원조의 혜택을 입었던 것은 아니었다. 독일 역시 한국 광부와 간호사를 채용해 인력난을 해결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됐던 독일이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NRW) 연방주를 중심으로 공업을 키우는데 한국의 파독 인력들이 큰 역할을 한 것이다. `라인 강의 기적(Wirtschaftswunder)`에는 한국인의 땀도 깃들어 있는 셈이다.
50년이 흐른 2013년. 파독 50주년과 한국독일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 다시한번 `파독`의 의미가 재조명되고 있다. 50년 전 두 나라 관계는 `원조` 경협에 밑바탕을 뒀다. 지금은 우리가 세계 제조업 강국으로 떠올랐다. 이제 서로의 강점을 융합해 새로운 미래 협력 관계를 만들어갈 시점이 됐다. 원조 경제가 창조적 경제 협력 관계로 발돋움할 때다.
우리나라와 독일은 닮은 점이 많다. `라인강의 기적`과 `한강의 기적`이 그 예다. 전쟁에서 패망한 독일과, 일제 강점 후 동족상잔으로 폐허가 된 한국의 과거 모습에서는 두 나라의 성장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이를 극복하고 일궈낸 두 나라의 지금 모습에 대한 찬사가 바로 `기적`이라는 표현이다.
내수보다는 수출에 주력하는 점, 분단의 역사, 뛰어난 인재 등도 두 나라의 닮은꼴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대목은 현재 두 나라의 산업 구조가 경쟁 관계라기보다는 주로 상호 보완적 관계라는 점이다. 독일은 기계, 화학·소재, 나노바이오, 마이크로, 자동차 부품, 신재생에너지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기초 기술이 탄탄하다. 제조·응용 기술이 뛰어난 한국은 최근 휴대폰·반도체·디스플레이·자동차·정보통신기술(ICT) 시장에서 세계를 호령한다.
독일 최대 주력 산업으로는 자동차·기계·화학을 꼽을 수 있다. 독일 자동차는 이름만으로도 그 위상을 짐작하게 할 만큼 엄청나다. 2011년 기준 3500억유로(약 389조원)에 달한다. 독일 전체 산업 규모의 약 20%를 차지하는 비중이다. 고용도 상당하다. 70만명 이상이 자동차 산업에 종사한다.
기계 산업도 독일이 자랑하는 업종이다. 기계 산업은 독일의 최고 수출 품목으로 꼽힌다. 산업 매출 규모는 1500억유로(2010년 기준)가 넘으며, 이 중 대부분이 수출이다. 특히 희귀 금속 채취를 위한 광산 기계, 친환경 에너지 관련 기계 등의 수요는 꾸준히 유발돼 유럽 재정 위기에도 불구하고 성장세를 지속하고 있다. 고용 규모는 자동차를 넘어선다.
독일 화학 산업의 입지도 강력하다. 세계 최대 화학회사도 독일 회사다. 규모는 기계 산업과 비슷하다.
독일은 오는 2020년까지 원자력을 완전히 폐쇄하기로 결정하면서 신재생에너지에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국가이기도 하다. 태양광 설치율도 세계에서 가장 앞선다. 독일 곳곳이 태양광 전지를 설치한 주택과 건물, 또 풍력발전기로 채워져 있다.
한국은 휴대폰·반도체·디스플레이·자동차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스마트폰 시대로 접어들면서 위상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는 이미 세계 시장 점유율 50%를 넘어선 절대 강자다. 비록 기초 기술을 부족했지만 지난 수십년간 제조·응용 기술을 키워온 덕분이다.
우리와 독일이 일부 산업들에서 1위를 굳히고 있지만, 급변하는 시장 환경은 미래를 점치기 힘들게 한다. 무섭게 성장하는 중국이 대표적이다. 끊임 없는 혁신이 필요한 이유다. 한국의 휴대폰·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과 독일의 기초·공정 기술이 손을 잡는다면 어떨까. 두 나라의 산업간 강점을 결합해 새로운 50년, 미래 시장을 함께 창조할 수 있는 전략적 협력이 가능할 것이다.
최근 한국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과 파트너십을 강화하기 위해 독일 화학·소재 기업들이 국내에 주요 거점을 잇달아 세우는 것이 바로 이런 추세를 반영한 자생적 움직임이다. 독일 자동차 부품·소재 기업들이 근래 한국 완성차 업계와 협력 관계를 구축하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세계 최고 수준인 독일의 연구소와 대학 인프라, 중소·중견기업들에서도 배울 점이 많다. 한국 경제의 80% 이상을 뒷받침하는 중소기업과 독일이 만나 미래를 그려볼 만 하다.
이신두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끊임 없은 혁신을 요구하는 시대에 양국은 어떤 분야에서건 보다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각자의 강점이 무엇인지만 알아도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분야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독 교역량 변화 (단위:1000달러)
자료:국가무역통계포털
문보경기자 okm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