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학자가 신음한다]<중> 말로는 과학 선진국, 실험실은 후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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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이공계 대학 실험실 설비 기준은 법적으로 정비돼 있지 않다. 환기·조도 등 설비 기준이 `학교 보건법`에 제시돼 있지만 일반 교실에 맞춘 기준이라 실험실 환경에 적용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그나마 있는 규정도 허울뿐이다.

해외 선진국에서는 대학 실험실 설비나 기준, 안전 관리에 명확한 기준을 만들어 사용한다. 미국에서는 주마다, 대학별로 안전보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안전 정책을 수립하고 책임자를 선별해 책임 영역을 명확히 구분한다. 미국 애리조나대학에서 연구했던 이은정 한국기계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실험실(랩)을 운영하면 실당 안전관리 담당자 한 명이 배정된다”며 “사용 후 약품도 안전관리담당자 허락 없이 함부로 버리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공계 대학원생이 어떤 약품을 사용하는지, 실험실 규제를 제대로 준수하는지 등을 전문 담당자를 둬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셈이다.

미국에서는 산업안전보건청(OSHA)이 주관기관으로 실험실 내 화학물질 안전기준을 수립한다. 화학물질 위생계획을 문서로 작성해 반드시 지키도록 한다. 사고 위험이 있을 때는 OSHA 안전 전문가가 정밀점검을 하게 돼 있다. 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에 따르면 미국 30개 상위 연구중심대학은 모두 대학 내 실험실 안전보건 관리를 담당하는 전담부서가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실험실 설비도 차이가 있다. 해외 선진국에서는 실험실 환기·온도는 기본으로 규정에 맞는 통제를 할 수 있다. 한 건물 안에 있는 실험실이라도 각각 통제 장치가 따로 작동한다. 이은정 연구원은 “랩마다 실험 분야가 달라 환경에 맞춘 환경 통제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호주에서도 `실험실 안전보건 표준(AS/NZS 2243시리즈)을 마련해 구체적인 실험실 구조와 안전 기준을 다루고 있다. 화학물질·미생물·방사선 장비 등 총 10개 분야를 세분화해 안전 보건기준을 제시했다.

교육과 사후 관리도 철저히 지켜진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에서 5년 이상 실험실 환경을 경험한 최기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박사는 “당시 대학에서 실험을 하겠다고 하면 안전 교육을 받아야 했다”며 “교육을 이수하지 못하면 실험실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 달에 한 번 내부 감사를 통해 실험실 안전 규정이 제대로 지켜졌는지 점검한다. 1년에 한 차례 외부 감사도 실시한다.

최 박사는 “불시 점검으로 화학물질 사용 기한까지 확인한다”며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학교와 담당 교수에게 벌금을 무겁게 부과한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연구실 안전환경 조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대학 안전관리위원회는 실험실 정기점검을 하게 돼 있지만 연 1회만 시행하면 된다. 설비 구비 여부 등 항목만 점검하도록 돼 있어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다. 김영택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우리나라도 안전점검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은 경우에만 1000만원 이하 과태료를 부과하지만 기준이 모호하다”며 “안전점검 수행에 대한 제재가 실험실에 강하게 부과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엄격한 실험실 통제로 실험에 참여하는 학생 문화도 안전 준수에 맞춰져 있다. 최기현 박사는 “우리 학생들은 실험 가운을 입고 매점이나 공공장소에 다니는 것을 종종 봤다”며 “이에 따른 제약도 구체적이지 않아 안전 문화 분위기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해외 실험실 안전 주관 기관과 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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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