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중견기업의 경영환경이 악화되고 있다. 제품 차별화나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미 제품 기술이나 디자인 등은 업계 전반적으로 평준화 된 상태다. 생산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다. 중견기업들이 악화된 경영환경을 탈피하기 위해 고심에 빠졌다. 이런 중견기업에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으로 공급망관리(SCM)가 제시된다. 판매와 수요를 예측해 연구개발(R&D)부터 생산·물류·재고·판매 관리에 적용,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고 상품을 시장에 적시에 출시한다. 성공적인 SCM 도입은 시스템 구축은 물론이고 각 부분의 프로세스와 기업 문화를 혁신해야 한다.
중견기업에게 SCM은 모호하다. 대기업과 일부 1차 대형 협력업체를 중심으로 도입된 SCM이 중견기업에게 실질적으로 어떤 효과를 가져다줄지 막연하다. 현재 자사 상황이 SCM을 도입해야 하는 상황인지도 판단이 서지 않는다. 실제 SCM 도입은 삼성전자와 LG전자,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 대형 기업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도입됐다. 이후 제조·유통 대기업 중심으로 SCM 도입이 확산됐다. 해외사업 확대로 글로벌 SCM 통합 프로젝트도 곳곳에서 진행했다. 그러나 중견기업의 SCM 도입은 일부에 그쳤다.
◇수요예측 없는 생산계획은 재고만 늘려
매출 1000억원에 이르는 중견 제조기업인 A사.
A사는 최근 B제품이 잘 팔리자 B제품 생산라인을 늘려 생산량을 큰 폭으로 늘렸다. 이렇게 생산된 B제품은 창고로 이동, 대리점으로 배송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특정 기간이 지나자 B제품은 대리점에서 판매되는 양보다 생산하는 양이 많아 창고에 쌓이는 물량이 늘어나게 됐다. 재고물량이 많아진 것이다.
결국 A사는 무리하게 B제품의 재고를 줄이기 위해 끼워 넣기나 할인 행사를 지속적으로 실시했다. 심지어는 대리점에게 무리하게 판매를 요구하는 `밀어내기`까지 실시했다. 결국 A사 매출은 급속도로 줄었고, 상당수 대리점은 계약 해지를 요구했다.
이는 명확한 수요예측 없이 순간의 판매 실적만 보고 제품 생산계획을 수립했기 때문이다. SCM 전문가들은 제품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매출 등 재무적 관점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생산과 판매를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프로세스와 정보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상당수 중견기업은 SCM에 대한 투자가 이뤄져 있지 않다. 판매운영계획(S&OP)을 월간에서 주간 단위로 단축시키기 쉽지 않다. 여전히 판매와 운영을 제품수와 고객 등 재무적 관점으로만 바라본다. 구매가 수요예측 기반으로 이뤄지지 않고, 영업도 창고에 쌓인 물량만을 기반으로 목표를 설정한다. 영업파트에서 무엇을 얼마나 팔려고 하는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구매가 이뤄지고, 판촉 활동 계획도 모른 채 생산을 한다.
류동식 자이오넥스 대표는 “중견기업 중 △제품 판매주기가 짧아 신제품 출시가 빈번한 제조기업 △생산 현장이 해외로 확대된 기업 △다품종 상품을 취급하는 유통기업 △원재료 공급이 중요한 식품기업 △가구업체 등 소비재 기업 △재고가 경쟁력 악화에 영향을 미치는 기업에 해당되면 SCM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CEO가 직접 SCM 도입에 나서야
중견기업은 대기업과 달리 프로세스나 정보시스템에 많은 투자를 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SCM 도입을 단기적인 프로젝트로 진행하기 보다는 장기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단순히 SCM 솔루션만을 도입하고 나서 SCM 체계를 갖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SCM은 정보시스템이 아니라 프로세스이고 문화다. SCM에 맞게 전사적으로 프로세스와 문화를 혁신하기 위해서는 SCM에 대한 오너십을 누가 갖느냐가 중요하다. 가트너는 각 부서별로 다른 SCM 전략을 수립해서는 안 된다고 권고한다. 구매 부서만의 관점으로 구매 비용을 낮추거나 재고를 줄이는 것은 전체적인 기업 경쟁력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유성민 언스트앤영 SC&O컨설팅 리더는 “CEO 주관으로 모든 부서가 모여 SCM 회의를 해야한다”며 “그러나 SCM 체계를 갖춘 후 회의를 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영업부서가 참여를 하지 않게 되고 결국은 일부 부서만의 SCM 회의가 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매트릭스 형태의 부서별 SCM 설계를 제시한다. 기업 목표에 맞게 전 부서의 SCM 전략을 매트릭스 형태로 배열한 후 부서별 핵심성과지표(KPI)도 이에 맞춰 수립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기업 목표가 `속도`에 초점을 뒀다면 구매와 물류비용이 더 들더라도 빠르게 납품 할 수 있는 조달력을 갖추는 데 집중하는 것이 효과적인 SCM 전략이다.
S&OP에 대한 고도화도 필요하다. 현재 S&OP 운영 수준은 △조달 운영에 급급한 단계 △수요와 공급 일치를 시도하는 단계 △재무를 고려한 협업 전략 수립 단계 △비즈니스와 연계해 재무성과 도출 단계 등 4단계로 구분한다. 그러나 상당수 중견기업은 1~2 단계에 그친다. 수준을 높이기 위해 CEO와 CFO 등이 SCM 의사결정권자로 직접 나서야 한다. 최근 까사미아의 SCM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는 이형우 까사미아우피아 대표는 “기업 특성과 조직에 맞는 SCM을 갖추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부 관계자가 직접 프로세스 혁신과 정보시스템 구축에 참여해야 한다”며 “외부 전문가에게만 맡겨 놓으면 대부분 실패한다”고 충고했다.
◇루셈, SCM 도입으로 단납기 대응 가능
디스플레이 반도체 후공정 전문기입인 루셈은 지난해 말 SCM 도입을 시작했다. 고객 요청 납기 준수와 생산계획의 유연성 확보, 자재조달 대응력 강화와 가시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고객 중심의 유연한 계획 체계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당시 루셈은 고객 납기가 3개월간의 예측 기반으로 주단위 체계로 전환했다. 생산계획 프로세스도 이에 맞게 표준화 돼야 했다. 생산·자재 공급 정보가 실시간으로 분석돼 고객 납기 이전에 관련 이슈를 파악하고 대응이 이뤄져야 했다.
수시로 변경되는 요구에 따른 유연한 생산계획 수립과 이를 지원할 수 있는 정보시스템도 필요했다. 다양한 변수를 반영한 기준정보를 적용, 생산계획 수립 고도화도 요구됐다. 자재 조달에 있어서는 생산계획에 따른 장납기 자재 소요와 발주정보 제공 체계가 갖춰져야 했다. 판매·생산·자재계획이 연동돼 실시간으로 계획대비 실적 모니터링도 가능해야 했다.
루셈은 이를 위해 영업·생산관리·구매자재 영역별 요구사항을 분석했다. 이 결과 △프로세스 표준화 △생산계획 시뮬레이션 구축 △자재요소 분석강화 △사전 경고 체계 구축 △모니터링 체계 구축 등 5개 과제를 도출했다.
과제 수행으로 3개월 간 1일 판매계획 체계와 D+1 생산계획 확정, 기준정보 관리 기능과 역할 정립이 가능해졌다. 자재·장비 변수를 반영한 계획 수립과 재공·공정 상황을 반영한 생산계획도 수립했다. 판매·생산계획 기반 자재소요 분석과 납기 차질 예상시 사전경고 체계도 갖췄다. 생산·자재입고 계획 대비 실적 모니터링도 이뤄진다.
루셈은 SCM을 도입함으로써 생산계획 확정일을 D+4일에서 D+1일로 단축하고 자재 조달리스크 사전 검증으로 단납기 요구에 대응할 수 있었다. 신규 사업에 대한 추가 인원 감축으로 비용절감 효과도 봤다. 생산 유연성과 업무 생산성, 고객만족도도 향상됐다.
신혜권기자 hkshi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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