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초순. 봄빛이 완연했다. 개나리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렸다.
그러나 정보통신부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었다. 정통부 안팎에는 얼음장 같은 냉기가 감돌았다. 대검이 PCS 수사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1998년 4월 7일 오후.
검찰은 이석채 전 정보통신부 장관(현 KT 회장)에 대해 감사원이 수사를 의뢰해옴에 따라 이날 PCS 사업자 선정과정 전반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검찰이 PCS 특혜의혹의 전면에 나선 것이다. 사태는 심각했다.
검찰은 이 사건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부장 이명재 검사장)에 배당했다.
검찰 관계자는 “감사원이 이 전 장관 수사 의뢰와 함께 PCS 사업자 선정과정 전반에 특감자료를 곧 제출하겠다고 통보해왔다”며 “자료가 넘어오는 대로 참고인 소환조사 등 본격적인 수사를 시작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검찰은 당시 미국 하와이에 체류 중인 이 전 장관이 귀국하는 대로 소환조사할 방침이며, 자신의 개입 사실을 부인하며 감사원의 출석요구에 불응한 이 전 장관이 조기귀국하지 않으면 입국을 종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검찰은 이 전 장관이 사업자 선정과정에 부당하게 개입한 사실이 확인되면 직권남용죄 적용이 가능한지 법률 검토작업을 벌이고 있으며, 이 전 장관 배후 유무도 캐낼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검찰총장 직할부대`인 대검 중수부가 수사에 착수한 이상 이 전 장관이나 정통부, 그리고 해당 통신업체는 검찰의 수사를 피할 수 없었다.
검찰은 이미 △PCS 사업자 선정 방식의 임의 변경 등 이 전 장관의 직권남용 여부 △선정위원 위촉 과정에서의 외부압력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여의도연구소 부소장 역임, 현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와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 등 문민정부 실세 개입 여부와 사업자 선정을 둘러싼 의혹에 대해 광범위한 내사를 벌여왔다고 덧붙였다.
이런 가운데 감사원이 이 전 장관이 LG텔레콤과 한솔PCS를 사업자로 선정하는 과정에서 직권남용 및 해당 업체와의 유착 등 부당하게 개입한 의혹이 발견됐다며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자 즉시 수사 착수를 밝힌 것이다.
중수부는 우리나라 최고 수사기관이다. 수사를 지휘하는 중수부장은 검사장급이다. 그 아래 과장도 지방검찰청 부장검사급이다. 과거 한국사회를 뒤흔든 대형 사건들이 모두 중수부를 거쳐 갔다. 중부수가 나서면 백이면 백, 형사처벌을 받는다고 봐야 한다. PCS 수사는 중수3과(과장 이귀남 부장)가 맡았다. 이 과장은 대검 중수부장, 법무 차관을 거쳐 이명박정부에서 법무 장관을 지냈다.
하지만 중수부는 최고 권력층이 정치적 판단에 따라 하명한 사건이나 검찰총장이 지시하는 대형 권력비리를 수사하다 보니 정치적 논란에 휘말리는 때가 적지 않았다.
PCS 수사 착수도 정치적 표적수사라는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감사원이 정기감사와 특별감사를 실시했으나 구체적인 혐의가 드러나지 않았는데도 검찰에 수사를 의뢰한 점이다. 감사원은 1997년 4월과 5월에 걸쳐 정통부 일반감사를 실시했다. 1998년 2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정통부에 특별감사를 실시했지만 구체적인 의혹을 찾지 못했다.
둘째, 정통부 일반감사에서 주의 2건에 그쳤던 PCS 사업자 선정과정에 특감을 실시한 후 구체적인 의혹을 확인하지 못했는데도 이 전 장관을 검찰에 수사의뢰한 것은 김영삼정권을 향한 현 정권의 표적수사라는 것이었다.
한승헌 당시 감사원장서리(현 변호사)는 그해 3월 14일 기자들에게 “PCS 특감은 생각보다 대단한 의혹이 밝혀진 게 없으며 대어를 낚을 가능성도 적어 보인다”고 말했다.
감사원의 한 관계자도 “특감이 이 상태에서 끝난다면 지난해 4월 정통부 일반감사에서 PCS사업자 선정과 관련, 주의 2건으로 마무리한 것에서 크게 진전된 것이 없다”며 “담당 공무원의 징계 여부도 불투명할 정도”라고 설명했다.
PCS 수사 배경에는 현철씨와 김기섭 전 안기부 차장 등이 특정업체를 선정하도록 이 전 장관을 통해 부당하게 개입했으리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1996년 6월 11일, 당시 야당은 PCS사업은 문민정부 정경유착의 결과로 그 과정에 특혜의혹이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탈락한 중소기업중앙회도 사업자 선정결과에 반발했다.
현철씨는 문민정부 시절 소통령으로 불리며 각종 인사와 이권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그를 둘러싼 각종 억측이 나돌기도 했다.
대통령직 인수위 지대섭 당시 경제Ⅱ분과 위원(청호컴퓨터 회장, 15대 국회의원 역임, 현 서울마주협회장)도 그런 의혹을 밝혀야 한다는 게 인수위 분위기였다고 증언했다.
“김영삼 대통령 차남 현철씨와 그의 측근이라는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 그리고 조동만 한솔PCS 전 부회장과의 관계에 말이 많았습니다. 현철씨의 고교 선배로 그와 가깝다고 알려진 이석채 전 장관 취임 후 갑자기 PCS 사업자 선정방식을 전무배점 방식으로 변경한 점이 특정업체를 봐주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어요.”
검찰 수사는 크게 세 가지로 진행했다.
사업자 선정 방식을 바꾼 이 전 장관의 직권남용 부분과 심사위원 위촉과정의 외부 압력, 그리고 현철씨와 김기섭씨 등 문민정부 실세의 개입 여부였다.
그해 4월 13일 조순 한나라당 총재(경제부총리, 한국은행 총재 역임)는 기자간담회를 열고 “PCS에 대한 검찰수사를 중단하면 언제든지 경제청문회를 열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4월 13일 오후 5시.
이명재 대검 중수부장(검찰총장 역임)은 첫 기자간담회를 열어 “PCS 선정비리와 관련, 사건 관계자들에 대한 계좌 추적을 위해 영장을 청구했다”고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내용.
-특이한 수사 진전사항이 있나.
▲오늘 오후 감사원으로부터 감사기록을 추가로 넘겨받기로 했다. 지난번 수사의뢰 때 세 권의 감사기록을 넘겨받은 데 이어 추가로 감사기록 20권을 넘겨받아 수사참고 자료를 활용할 방침이다. 추가기록엔 감사원이 이번 특감과정에서 민간경제연구기관과 감사교육원의 박사급 외환·금융 분야 전문가를 동원, 외환위기 전개상황과 정부 대응 과정의 문제점 등을 분석한 감정의견서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안다. 방대한 감사 자료를 분류, 정리하는 작업 때문에 송부가 다소 늦은 것 같다.
-소환 예정자는 있나.
▲외환위기 수사팀인 중수2과에서 한국은행 국제부 직원 2명과 감사원의 감사담당 직원 2명을 부르기로 했다. 또 PCS 선정비리 수사팀인 중수3과에서도 심사과정에서 탈락한 업체 관계자 2명을 소환할 예정이다.
-압수수색 영장은 청구했나.
▲PCS 선정 비리와 관련, 사건 관계자들에 대한 계좌추적을 위해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했다.
-사건 관계자 인원 수는.
▲밝힐 수 없다. 그러나 관련된 개인이나 업체는 모두 포함돼 있다.
-이석채 전 장관이 포함돼 있나.
▲알아서 판단해보라.
-현직 또는 전직 공무원도 있나.
▲현직 공무원이 포함됐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PCS 선정에 관여했던 전직 공무원은 포함된 것으로 안다.
-계좌추적 대상 인원이 출국금지 인원(이 전 장관 포함 4명)보다 많은가.
▲비슷하거나 다소 많은 것으로 안다.
-PCS 비리만 계좌추적하나.
▲현재로서는 그렇다. 아무래도 먼저(감사원으로부터) 접수한 사건이니까 진척이 있다.
-이 전 장관과는 접촉을 시도하고 있나.
▲접촉 라인을 구축하고 있는 중이다.
-혹시 계좌추적이 이 전 장관에 대한 `귀국 압박용`이 아닌가.
▲그런 건 아니고 수사과정에서 필요에 의해 (계좌추적에) 들어가는 것뿐이다.
-이번 수사가 언제쯤 끝날 것 같나.
▲아직 갈 길이 멀다. 우리는 가급적 빨리 종결하려는 방침이지만 수사가 따라오지 못할 것 같다.
PCS 의혹 수사는 전 정권에 대한 정치적 표적수사라는 여론이 일자 청와대가 해명에 나섰다.
그해 4월 15일.
박지원 청와대 공보수석(문광부 장관, 청와대 비서실장, 민주통합당 원내대표 역임, 현 국회의원)은 기자회견을 통해 “외환위기나 PCS 의혹 등 검찰수사에 정치권이 이래라 저래라 얘기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박 수석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치보복이나 표적사정은 없다는 것을 확실히 밝혀 둔다”고 설명했다.
그해 4월 16일.
대검 중수부는 이날 PCS사업자 선정과 관련, 이석채 전 장관에게 금품이 제공됐는지를 밝히기 위해 LG텔레콤과 한솔PCS 사무실 등에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검찰은 이날 오후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서울 서초구 서초동 한솔PCS 사무실과 강남구 역삼동 LG텔레콤을 압수수색해 이들 회사의 결산보고서와 창업비용, 회사 자금 출금내역 서류를 압수했다. 검찰은 이 자료를 정밀 분석해 PCS사업자 선정과 관련한 대가로 정통부 공무원과 정계 인사들에게 금품이 전달됐는지를 집중 분석했다. 장차 몰려올 거대한 검찰발 폭풍우의 전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