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디자인스토리의 문을 열면서 이촌역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을 잇는 `나들길`을 소개한 바 있다. 당시 한국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유물을 대하러 가는 마음가짐을 어떻게 디자인했는지 이야기했다. 나들길 이후에 내가 작업한 `MI(Museum Identity)` 디자인은 유물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제안했다.
사인시스템(Signsystem)을 구성할 때는 국내외 방문객의 편의를 우선 고려해 체계적으로 정보를 안내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자연스럽게 관람을 유도하면서 친절하고 품위 있는 우리나라 대표 박물관의 이미지를 견고히 하는 것에 중점을 뒀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소장 유물의 양이 방대하고 공간이 넓어 모든 유물을 보려면 하루 24시간으로 부족하다. 이노디자인 공간디자인팀이 개발한 유물 내비게이션은 1층 입구의 종합 관람안내 사인에 대표적 유물 정보를 표기했다. 시대순의 길고 지루한 관람방법에서 벗어나 주요 콘텐츠(유물)와 그와 비슷한 연대의 다른 유물 정보를 제안해 더욱 흥미로운 감상의 기회를 준 것이다.
내비게이션에서는 미리 유물에 대한 모든 정보를 보여주기보다 관람객의 눈길을 끌고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유물의 조형을 평면 그래픽으로 재창조한 아이콘이 쓰였다. 관람객의 눈높이에 맞춰 정보도 새롭게 만들었다. 사인이 위치한 으뜸홀에서 역사의 길을 바라보는 관람객 시각 중심의 세로형 지도를 별도 제작해 더욱 편안한 길 안내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모든 사인시스템은 따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돼 관람객이 필요한 시점에 관람 동선과 연계된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배치했다. 다양한 방문객을 고려해 숫자, 그림, 색상을 주로 한글, 영어, 한문 3개 언어로 설명했다.
공간디자인을 하는 동안 건물의 구조, 유물 위치 무엇 하나 물리적으로 바뀐 것이 없었다. 그러나 기존의 관람안내에서 불편한 점들을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관람객의 관점에서 이용 편의성을 제고해 동선을 기획하고 디자인했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된 것을 대체하는 `리디자인`이라는 이유로 건축될 당시의 자재를 뒤바꾸거나 시스템을 되풀이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노디자인팀에도 건축 당시의 성격과 디자인 이념을 유지하면서 이전보다 더 나은 사인시스템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나들길 초입에서 박물관의 주된 건축자재인 라임스톤을 차용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인시스템에도 건축과 사인이 하나가 되도록 장식성을 배제하고, 건축 및 인테리어에 쓰인 소재의 물성을 강조했다. 투광성이 높은 저철분 유리로 너무 도드라지지 않으면서 동시에 주변 환경과의 조화력을 강화했다. 한편으로는 에칭가공법을 이용해 전통 창호에서 느껴지는 폐쇄적이면서도 개방적인 양면적 감성을 담았다. 이는 벽면 석재의 색상, 소재감과 조화로움을 이루고 가시성을 확보해 사인시스템이 자연스럽게 건물에 녹아들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사인시스템의 디자인 컨셉트인 `모던 코리아(Modern Korea)`를 표현하기 위해 헤어라인 스테인리스 스틸로 라임스톤과 대비시켰고 무게감과 함께 고급스러운 느낌을 이끌어내었다. 토기, 도자기, 돌, 쇠 등 18가지의 유물에서 추출한 국립중앙박물관의 대표 색깔은 각 시대관을 대표하는 컬러시스템이 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컬러시스템은 건축요소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시설의 성격과 정해진 위계에 따라 절제돼 적용했다.
제품에 회사 및 브랜드의 정체성을 담는 `CIPD(Corporate Identity through Product Design)`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건물은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와 그 안에 포함하는 요소들이 곧 정체성이 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건축 당시 담고자 했던 이념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방대한 양의 유물들이 그 자체로 정체성이다. 디자이너의 역할은 잘 드러나지 않는 건물의 가치를 관람객들이 잘 느낄 수 있도록 돕고, 동시에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만드는 데 있다.
김영세 이노디자인 회장 twitter@YoungSe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