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스마트그리드(지능형전력망)가 암초에 걸렸다. 세금 1조7000억원을 투입해 2020년까지 전국 2194만 가구에 원격검침인프라(AMI)를 구축한다는 계획은 아직 멀게만 느껴진다. 2010년 시작 이래 지금까지 제대로 구축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호환성 미비 부품을 사용하는가 하면 시험 성적서 조작 의혹 등 끊임없는 사건사고로 이미 두 차례에 걸쳐 감사원 감사를 받았다. 주무부처까지 정책 개선에 나섰지만 크게 달라진 게 없다.
한전은 지난 4월 AMI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4개의 전력선통신(PLC)칩을 검증하는 사업에 A사를 선정했지만 사업은 착수도 못하고 있다. 특정 칩 공급업체인 A사에게 나머지 3개 회사들은 부품과 기술정보를 제공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사업 수행 능력이나 자격 검증 없이 누구나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한전의 최저가입찰제가 원인이 됐다. 올해 200만호 사업을 앞두고 실시한 최종 칩 검증사업에 A사가 다시 참여해 또 다시 논란이다. 칩의 상호운용성을 점검하는 현장평가에 칩개발사가 아닌 공급사가 참여해 기술 지원이 쉽지 않다는 우려에서다. 더욱이 A사가 공급하는 칩은 이미 사업에 참여하고 있어 중복 논란도 있다. 예정에도 없던 A사의 갑작스런 사업 참여로 검증사업은 한 달 가량 지연됐고 평가도 복잡해질 전망이다.
결국 한전의 애매한 사업 참여 기준이 이 같은 빌미를 제공하는 셈이다. 전문성과 사업 수행 능력을 평가할 제도적 장치가 없어 아쉽다. 한전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컨트롤타워 부서까지 조직했지만 다른 부서와의 소통이 쉽지 않아 보인다.
AMI는 우리 후대를 위한 인프라다. 전기요금 과금에만 사용된 검침시스템에 ICT을 접목해 가정을 포함해 전국의 에너지 사용 패턴을 분석해 발전소의 생산 전력을 제어해 국가 전체를 스마트그리드로 실현하는 핵심기반이다. 이젠 한전의 결단이 필요한 때다. 컨트롤타워 부서의 역할을 명확히 하고 제도적 장치 마련은 물론, 책임의식을 가지고 사업에 임해야 한다.
박태준기자 gaiu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