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141>배순훈 장관 `빅딜`파문

“빅딜이란 근본적으로 과잉 투자를 해소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자동차는 맞는 얘기지만 생산량의 95%를 수출하는 전자를 포함한 것은 잘 이해할 수 없다.”

1998년 12월 16일.

1998년 12월 21일 이임식을 갖고 청사를 떠나던 배순훈 정통부 장관이 부임하는 남궁석 신임 장관과 우연히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방통위 제공>
1998년 12월 21일 이임식을 갖고 청사를 떠나던 배순훈 정통부 장관이 부임하는 남궁석 신임 장관과 우연히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방통위 제공>

배순훈 정보통신부 장관(현 S&T중공업 회장)은 이날 오전 7시 30분 전국경제인연합회 20층 경제인클럽에서 열린 전경련 초청 최고경영자 월례조찬회의에 참석해 이같이 말했다. 이 발언이 화근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배 장관은 이어 “기업을 구조조정해서 경쟁력이 생긴다고 하는데 특히 대기업의 신인도·신용을 이렇게 떨어뜨려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대우전자를 오래 경영했다. 세계 시장에 나가서 텔레비전을 남들보다 싸게 만들어서 많이 팔자. 이게 내가 얘기하는 탱크주의”라며 “대우가 국내 가전 3사 중 꼴찌라고 하지만 국외 수출을 합치면 비슷하다. 그런데 (국제 시장에서 중저가 제품으로 승부를 걸던) 대우가 느닷없이 `월드 베스트`라는 삼성 마크를 붙여 팔 수 있겠는가”라고 빅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배 장관의 이 발언은 순식간에 태풍의 눈으로 등장했다. 배 장관의 발언 진의가 어디에 있건 역린(逆鱗)을 정면으로 건드린 셈이었다. 현직 장관이란 점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재벌 개혁의 핵심으로 정권의 명운을 걸고 추진하는 5대 그룹 빅딜에 현직 장관이 반대한 것으로 언론이 일제히 보도한 까닭이다. 배 장관의 `빅딜 반대` 발언은 그 자체만으로도 권력 누수를 촉발할 수 있었다.

당시 5대 그룹 빅딜은 청와대의 강력한 추진 의지와는 달리 순조롭게 굴러가지 않았다.

해당 기업들은 정부의 빅딜에 부정적이었다. 삼성자동차는 삼성자동차 연구소 비상대책위원회가 인터넷에 빅딜 반대 홈페이지를 개설해 반대시위를 했다. 반도체 빅딜을 놓고는 LG와 현대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정부 내에서도 인위적인 빅딜에 반대하는 기류가 없지 않았다. 전주범 대우전자 사장은 정부의 빅딜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다 경질됐다.

배 장관의 빅딜 발언에 청와대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날 강연과 관련한 배 장관의 증언.

“그날 조찬강연 내용에는 빅딜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었습니다. 참석자 중 누군가가 `대기업 빅딜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사견을 전제로 `IMF는 기업의 부채를 줄이라고 한 것이다. 대기업 빅딜은 구조조정의 목적이 아니다`고 대답했습니다. IMF는 대기업 빅딜을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일보는 17일자 초판에 `배 장관 빅딜 반대`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배 장관은 가판 보도를 보고 언론사에 연락해 “이날 발언은 빅딜을 절대 반대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이 신문은 배 장관의 해명을 기사에 반영했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날자 조선일보 만평(漫評)은 사태를 더 꼬이게 했다. 만평은 김대중 대통령이 옥좌에 앉아 있고 다른 대신들이 모두 엎드려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유일하게 배 장관이 일어서서 `빅딜 NO`라며 외치는 그림이었다. 제목으로 `예스맨만 있는 줄 알았더니…`라고 달았다. 감성을 자극하는 만평이었다.

12월 17일 오후.

김대중 대통령은 베트남 국빈방문과 아세안과 한·중·일 간 9+3 정상회담 등 2박 3일간 베트남 방문을 마치고 서울공항으로 귀국했다. 재계의 시선은 청와대로 쏠렸다.

청와대 경제수석실 L비서관의 말.

“김 대통령이 강력히 추진하는 대기업 빅딜에 현직 장관, 그것도 빅딜 해당기업의 CEO를 지낸 배 장관이 그런 발언을 했으니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게 청와대 분위기였습니다. 자칫하면 김대중정부의 재벌개혁 의지를 훼손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배 장관이 16일 오전 전경련 초청 월례조찬회에서 한 강연내용은 무엇인가. 구조조정과 관련한 배 장관 발언 내용을 보자.

△장관이 되기 전에 대우에서만 22년 근무했는데, 요즘 빅딜이 돼서 대우전자가 이슈가 되고 있다. 대우전자 직원들이 이메일로 장관 그만두고 대우전자로 돌아오라는 얘기를 많이 올리고 있다(웃음). 관직은 처음인데 기업체와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것 같다.

△기업 구조조정해서 경쟁력이 생긴다고 그러는데 특히 대기업의 신인도·신용을 이렇게 떨어뜨려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대우전자를 오래 경영했다. 세계 시장에 나가서 텔레비전을 남들보다 싸게 만들어서 많이 팔자, 이게 내가 얘기하는 탱크주의다. (중략) 대우가 국내 가전 3사 중 꼴찌라고 하지만 국외 수출을 합치면 비슷하다. 그런데 (국제 시장에서 중저가 제품으로 승부를 걸던) 대우가 느닷없이 `월드 베스트`라는 삼성 마크를 붙여 팔 수 있겠는가.

△빅딜이란 근본적으로 과잉 투자를 해소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자동차는 맞는 얘기지만, 생산량의 95%를 수출하는 전자를 포함한 것은 잘 이해할 수 없다. 조선은 100% 수출이다. 한때 과잉 생산 능력이 문제가 됐지만 지금은 그런 얘기가 없다. 지금은 기업 신용도가 가장 중요한 시대인데 국제 신인도에 해를 주는 일을 하면 손해다. 비판으로서가 아니라 건설적 의미에서 받아들여 달라.

△전에 기업에 있을 때는 김우중 회장에게서 전권을 위임받아 모든 일을 신속하게 결정했으나, 장관이 되고부터는 되는 게 없다. 일만 하려고 하면 무슨 협의다, 국회다 해서 시간이 엄청나게 걸린다.(후략)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배순훈 정통부 장관은 17일 오후 무거운 표정으로 김중권 대통령비서실장(새천년민주당 대표 역임, 현 변호사)을 만났다. 표정이 심각하기는 김 실장도 마찬가지였다.

김 실장이 “어떻게 된 일이냐”며 말문을 열었다.

배 장관은 조찬강연 내용을 설명한 후 “빅딜에 관해 반대한 적이 없다. 다만 기업의 부채를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진의가 잘못 전해졌다”고 해명했다.

배 장관의 증언을 토대로 그날 대화를 재구성해 본다.

“사태가 어렵게 돼 걱정스럽습니다.”

“사표를 내라는 것입니까.”

“상황을 좀 더 두고 보시죠. 그러나 일단 사표를 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배 장관은 김 실장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김 실장도 “그날 배 장관이 내방으로 와서 사표를 냈다”고 확인했다.

배 장관의 사표는 곧장 수리됐다.

청와대는 18일 배 장관의 경질을 공식 발표했다. 박지원 청와대 대변인(대통령비서실장, 문광부 장관 역임, 현 국회의원)은 “후임은 법 절차에 따라 총리의 제청을 받아 임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 대통령은 대기업 빅딜 파문의 조기진화와 다른 각료들에 경고의 의미로 배 장관의 경질을 결정했다고 한다.

탱크주의 장관으로 국민에게 인기가 높았고 김대중 대통령이 파격적으로 발탁했던 대기업 CEO 출신 배 장관은 그렇게 물러났다. 그는 재임 10개월 동안 거침없는 발언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는 취임 초 “경쟁력 없는 기업은 망해야 국가 경쟁력이 생긴다”고 말했다. 그는 직원교육 시 “기업에서 절대 돈 받지마라. 돈 필요하면 장관에게 말해라. 내가 구해주겠다”고 강조했다.

배 장관은 초고속통신망 구축에 역점을 두었다. 김 대통령도 초고속통신망 구축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배 장관 그거 왜 깔아야 합니까.”

“목포 사는 고교 3년생이 서울 강남에 있는 고교의 수업을 받으려면 이걸 깔아야 합니다. 전북 정읍 최 씨 할머니가 손수 가꾼 유기농을 서울 부자에게 직접 팔 수도 있습니다.”

배 장관의 증언.

“초고속통신망 구축사업에 당시 정통부 과장이던 형태근씨(방통위 상임위원 역임, 현 동양대 석좌교수)와 신용섭씨(방통위 상임위원 역임, 현 EBS 사장)가 주말 근무도 마다하지 않고 일했습니다.”

당시 정통부는 부처 평가에서도 1위에 올랐다. 특히 만년 적자를 보던 우편사업에 민간 경영기법을 도입해 115년 만에 우정사업을 흑자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배 장관의 말.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기업과 달리 행정부에서는 제대로 추진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처 간 협의다 국회 통과다 하는 게 힘들었습니다. 특히 국회와는 늘 갈등 관계였습니다.”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곧장 해외로 떠났다. 모르코에서 쉬면서 사하라사막으로 갔다. 그런데 사막으로 휴대폰이 걸려 왔다. 사막에서 휴대폰이 터지다니 놀라웠다. 전화는 미국 투자기업인 왈리드 앨로마 어소시에이츠 대표인 앨로마라였다.

배 장관의 말.

“이 사람이 `대우전자 인수에 관심이 많다. 우리는 돈밖에 없는 투자자들이고 회사를 인수하면 누군가가 경영을 맡아줘야 하는데 회사를 나스닥에 상장할 테니 당신이 경영을 해달라`는 겁니다. 잘못하다간 오해를 살 것 같아서 구체적인 투자규모와 상장일정 등을 제시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한국 장관 출신이니 이 사업은 한국 국익에 도움이 돼야 하고, 또 내가 대우 출신이니 김우중 회장에게도 도움이 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왈리드 앨로마 측은 대우전자에 32억달러를 투자해 2년간 회사를 개편한 뒤 10억달러를 추가로 투자해 세계 최대의 가전업체로 키운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배 장관은 이런 조건이라면 국가나 기업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배 장관의 이어지는 증언.

“연봉도 많이 주겠다는 겁니다. 3억달러를 제시하더군요. 김우중 회장에게 이런 내용을 알렸고 양측은 1999년 7월 MOU까지 교환했습니다. 이헌재 당시 금감원장(부총리 역임, 현 코레이 고문)이 만나자고 하더니 `형님 해외 매각이 잘되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했어요. 나중에 김 회장이 반대해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배 장관 경질 후 김대중정부는 대기업 빅딜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정부가 주도한 대기업 빅딜은 실패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치가 시장에 개입하면 어떤 부작용을 낳는지를 보여준 사례였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