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이 되려면 여성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여성 잠재력이 국가 미래경쟁력을 좌우한다.” 얼마 전 여성주간을 맞아 박근혜 대통령 표현이다. 오래전부터 여성 CEO, 여성 인재에 대한 사회적 불합리와 문화를 화제로 꺼내면 모두들 여성이 이제 살 만하지 않느냐, 지금 시대에 남녀를 구분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말로 더 이상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던 것을 경험해 왔던 나로서는 뜨거운 공감으로 다가왔다.
남녀평등 아니 한편에서는 여성이 우월하다는 표현까지도 간간이 들리는 시대에 우리 여성의 자화상이 어떻기에 이렇게 시대에 맞지 않는 것 같은 말에 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얼마 전 여성인구가 우리 총인구의 절반이 되었다는 통계청 발표가 있었다. 통계 집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더불어 대학진학률, 교육기간 등 여성 교육 수준이 남성을 앞서가기 시작한 지도 오래다. 교직, 공직, 사법시험 등 전문직에서는 이미 여성이 두각을 나타낸다. 그런데도 조금만 돌아보면 여성의 잠재력, 여성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말들이 여전하다. 이유가 무엇일까.
최근 여러 방면에서 나아지는 것이 사실이고, 많은 정책과 표현에 기대와 감사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왜 그전에는 인정하지 않았는지, 인정하면서도 왜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는지 한번쯤 생각해봐야 한다.
남아선호사상을 극복하고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게 된 것도, 세계 최고의 교육수준을 자랑하는 자질도 대한민국에 사는 여성에게 기회로서 활용될 일이 없었다. 여전히 고용률, 임금격차에서 OECD 최하위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경제활동 참여율은 49.9%로 남성에 비해 23.4% 적다. 임시 일용직 비율은 35.3%로 남성 20.7%에 비해 높다. 임금은 남성의 68% 수준이다.
산업계도 다르지 않다. 여성 인재의 저성장에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이라는 말이 오랫동안 수식어처럼 따라다니는, 일말의 개선도 없이 마치 당연한 현상인 것처럼 새겨진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여성 사업체가 37%라고 말하지만 생계형 소자본 창업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요즘 창조경제의 추진동력으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벤처기업 중 비중은 7%대를 겨우 넘겼다. 현장에서는 사업 파트너로서 여성 CEO와의 협상 테이블 자체를 회피하는 일이 아직도 있다고 한다. 근로자로서, CEO로서 어떤 열악한 상황에서 하루하루를 견뎌왔는지에 사회적 관심도 매우 낮았던 것이 사실이다.
여성 인구가 절반이 된 시점에서 역할에 대한 스스로 자각과 책임 있는 행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머지않아 5 대 5라는 인구수를 앞세워 이제 평등이 실현됐다든지, 인위적으로라도 양적 균형을 만들면 되지 않느냐는 식의 논리가 나타나지 않을지 걱정이다. 진정으로 여성이 제 역할을 감당하려면 기회의 균형, 5 대 5 질적 균형이 이뤄져야 한다.
아직도 일부 학교에서 남아 있다는 반장은 남자, 부반장은 여자라는 공식처럼 모양만 그럴싸한 양적 균형을 맞추는 것은 지양돼야 한다. 내가 바라는 균형은 인위적으로 짜맞추는 급여의 균형도, 매출의 균형도 아니다. 오랜 시간 마치 문화인 것처럼 정착된 잘못되거나 부족했던 부분을 하루빨리 메울 수 있는, 그래서 동등하게 출발할 기회를 줄 수 있는 단계별, 모판형 인프라를 만들어 주기를 기대한다.
얼마 전 박인비 선수가 3개 메이저대회 타이틀을 휩쓸며 골프계에서 우리 대한민국 여성 골퍼의 위상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박세리가 그 뿌리가 됐다. 해본 사람이 있는 분야와 이제 시작하는 분야 성과는 다르다.
산업계도 마찬가지다. 창업하는 여성 기업이 많아질수록, 성공하고 상장하는 여성 기업이 많아질수록 산업계 박인비가 등장할 수 있다. 아직 우리는 해본 적이 있는 여성 CEO 롤 모델이 부족하다. 기존 기업도 이제 시작하는 분야에 놓여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누군가를 바라보고 누군가의 성공을 교과서 삼아 제2, 제3의 성공을 이룰 수 있도록 산업계도 여성이 해본 분야, 해볼 만한 분야로 만들어주는 것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다.
`5 대 5 균형` 단순히 인구수, 기업 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대등한 위치와 관계를 뜻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과연 그런 위치와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까. 창조경제 시대 대한민국 절반인 여성이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사회적 관심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바란다.
이은정 한국여성벤처협회장 eunjlee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