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5월부터 의무 적용되는 미 분쟁광물 규제가 발등에 불로 다가왔다. 이미 국내 전자 업계는 가시적 영향권에 들어섰다는 평가다. 실제로 주요 해외 바이어의 분쟁광물 사용금지 요청과 관련해 정보보고 요청이 크게 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분쟁광물은 콩고와 인근 국가에서 생산된 주석과 탄탈룸, 텅스텐, 금 4대 광물을 말한다. 분쟁지역에서 생산된 광물의 판매자금이 반군으로 유입되고, 광물 채취과정에서 인권유린과 아동노동력 착취 등의 사회적 문제가 불거지면서 이를 제한하기 위해 분쟁광물이 지정됐다. 미국은 지난해 8월 콩고 인근에서 생산된 분쟁광물을 사용해 제품을 생산하는지를 미 증권거래위원회에 의무적으로 보고하는 안을 최종 통과시켰다. 정식 발효는 내년 5월 말이다.
15일 정부와 업계에 따르면 국제 분쟁광물 의무보고 시한이 10개월 이상 남았지만 국내 전자부품업체와 제조사 다수가 이미 분쟁광물 관리 요구를 미국 주요 바이어들로부터 받고 있다.
반도체 제조 대기업 A사는 미 바이어로부터 글로벌기구인 전자산업시민연대(EICC)의 보고양식 적용 여부와 분쟁광물 사용 여부 등 질의를 지난달에만 20건 이상 받았다. 중견 가전업체 B사는 수출 고객사로부터 제품은 물론이고 조달부품에 사용된 소재 유통경로를 서너 달 전부터 요구받기 시작했다. 대기업 계열 전자부품업체 C사도 미국 공급용 부품에 원산지정보와 수급경로 등의 자료 제출을 요청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사실상 수출을 하는 국내 전자산업계 전체가 영향권이다. 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KEA)는 우리나라의 세계 무역 비중(3.3%, 1조2000억달러)을 감안할 때 초기 대응 비용만 약 5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분쟁광물 규제는 새로운 무역장벽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분쟁광물 법제화는 미국을 넘어 유럽연합(EU)·호주·캐나다 등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국내 산업계의 부담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분쟁광물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증빙 과정에서 시간·비용 등 관리 부담이 커졌다.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에는 2·3차 협력업체는 물론이고 원 소재 판매자 정보까지 모두 포함해야 한다. 회사 내부는 물론이고 관련 생태계까지 꼼꼼히 챙겨야 한다. 실사과정에서 내부 영업기밀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도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분쟁광물을 회피해 핵심 소재를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다. 휴대폰 필수소재인 탄탈룸은 60~80%가 콩고와 그 지역 인근에서 생산된다. 향후 원재료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원자재 확보를 위한 공급망(SCM) 관리가 중요해졌다.
분쟁광물 사용을 지적받고, 글로벌 시민단체의 타깃이 된다면 최악이다. 적발 기업 제품은 글로벌 시민단체의 불매대상 리스트에 오른다. 일시적 매출 감소보다 기업이미지 추락은 더 큰 부담이다.
김기정 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 센터장은 “대기업은 2·3차 협력사까지 모두 분쟁광물 문제가 없도록 관리해야 한다”며 “규제가 눈앞에 다가왔지만 중소기업 대다수는 아직까지 상황 인지 자체도 부족한 편”이라고 말했다.
국내 삼성전자와 LG전자 등은 협력사를 포함해 분쟁광물 사용 여부와 소재추적 시스템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산업통상자원부와 KEA는 분쟁광물 등록·관리 시스템을 구축하고 보고양식 표준화에도 착수했다. 하반기에는 글로벌 인증기관과의 교차 승인 시스템 구축, 중소기업 대상 설명회에 속도를 내기로 했다.
전자 업계 고위 관계자는 “규제는 부담스럽지만 경쟁관계에 있는 글로벌 대기업도 모두 같은 의무가 있다”며 “방어적 대응보다 제품 신뢰도를 높이고 국제 표준과 인증을 주도하는 등 상대적 우위 확보 전략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승규기자 seu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