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145>전자문서 인증시대 개막

그것은 미래를 향한 새 이정표였다.

1999년 7월 1일.

전자거래기본법과 전자서명법이 발효됐다. 이 법은 전자문서 인증시대 개막을 예고했다. 그동안 각종 거래 때마다 사용하던 인감이나 서명 대신 공인인증기관이 이를 대행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한국정보인증은 1999년 7월 5일 창립기념식을 갖고 출범했다. 왼쪽부터 조정남 SK텔레콤 사장, 정선종 ETRI 원장, 이동호 은행연합회장, 남궁석 정통부 장관, 이정욱 사장, 서정욱 과기부 장관, 박성득 전산원장, 곽병화 제일화재해상보험 사장, 이철수 한국정보보호원장.
한국정보인증은 1999년 7월 5일 창립기념식을 갖고 출범했다. 왼쪽부터 조정남 SK텔레콤 사장, 정선종 ETRI 원장, 이동호 은행연합회장, 남궁석 정통부 장관, 이정욱 사장, 서정욱 과기부 장관, 박성득 전산원장, 곽병화 제일화재해상보험 사장, 이철수 한국정보보호원장.

그해 7월 5일. 정보공인인증 기관 1호가 출범했다. 한국정보인증이다.

이정욱 한국정보인증 사장(한국통신 사장대행 역임, 현 한국정보통신기술인협회장)은 이날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 9층에서 창립 기념식과 현판식을 갖고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남궁석 정보통신부 장관(작고, 국회 사무총장 역임)과 서정욱 과학기술부 장관(현 KT 고문), 박성득 한국전산원장(정통부 차관 역임, 현 한국해킹보안협회장), 이동호 전국은행연합회장(내무부 장관 역임), 정선종 한국전자통신연구원장(현 통신위성우주산업연구회 고문), 이철수 한국정보보호진흥원장(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ICT대학교 부총장), 조정남 SK텔레콤 사장(부회장 역임, 현 고문), 곽병화 제일화재해상보험 사장 등이 참석했다.

이정욱 사장은 경과보고에서 “한국정보인증은 지난 2월 5일 전자서명법이 공포됨에 따라 태동하게 됐다”면서 “앞으로 전자문서인증은 물론이고 모든 전자상거래에 인증업무를 수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정욱 사장의 증언.

“그해 5월 초 어느 날. 남궁석 장관이 장관실에서 잠깐 보자는 연락이 왔어요. 무슨 일인가 하며 영문도 모른 채 갔더니 거두절미하고 `전자상거래를 위한 공인인증기관을 설립하라`는 겁니다.”

남궁 장관은 이 사장에게 “우리나라 최초로 7월 1일 전자서명법이 발효된다. 이에 맞춰 공인인증기관을 설립해 업무를 시작해야 하니 시일이 촉박하다. 공인인증 업무를 전담할 회사를 6월 말까지 설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궁 사장은 이 사장이 1991년 한국통신 정보통신사업본부장으로 일할 때 만났다. 그해 12월 한국통신 자회사인 한국PC통신 사장에 남궁석 사장이 취임했다. 남궁 사장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부름을 받아 1993년 9월 삼성SDS 사장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이 본부장과 호흡을 맞춰 일했다.

이 사장은 당시 맡고 있던 한국통신 경영자문위원장직을 사퇴하고 공인인증기관 설립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 사장의 이어지는 말.

“그때부터 정신없이 뛰었습니다. 사무실이 없어 한국통신에 이야기해 한국통신 목동 건물 2층에 방을 얻어 간판을 내걸었습니다. 곧장 공인인증기관 설립 전담반을 구성했습니다.”

전담반장 겸 설립추진위원장은 이 사장이 맡고 정부 측 실무총괄은 전성배 정통부 사무관(방통위 국제협력관 역임, 현 중앙공무원교육원 파견)이 담당했다. 정통부에서 석제범 사무관(방통위 통신정책국장 역임, 현 새누리당 수석전문위원)이 반원으로 가세했다. 반원으로 고병훈(포스코), 김낙중(SK텔레콤), 김재중(LG CNS, 현 한국정보인증 이사), 김용준(외부 전문가), 김주현(삼성SDS), 박용건(한국무선국 관리사업단), 백석철(한국통신), 이석훈(외부 전문가), 이철호(한국통신), 정왕호씨(외부 전문가)가 참여했다.

이 사장은 국내 정보보호 및 공인인증 사업 시장규모, 매출액, 수익성 등을 예측하고 회사의 자본금 규모를 200억원 정도로 정했다. 설립 후 3년간은 영업이익을 내기 어렵다고 판단해 산출한 금액이었다.

이 사장은 정보통신기업들에 투자를 권했다.

한국통신과 삼성SDS, SK텔레콤, LG인터넷, 한국무선국 관리사업단, 한국정보통신, 다우기술, 일진, 제일화재해상보험, 대우공업, 삼경정보통신, 세림이동통신, 신후 무역, 중앙상선, 테라, 포스데이타, 풍기산업, 하나로통신, 한국신용정보, 한국신용평가정보, 한솔텔레콤, 훼스트시스템 22개사가 주주로 참여했다.

자본금으로 245억원을 유치했으나 이를 200억원으로 조정했다. 사무실을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 9층으로 옮겼다.

이 사장의 회고.

“당시 인증기관 설립을 추진하다 보니 다른 부처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장까지 내정한 상태였어요. 부처 간 경쟁이 심했습니다.”

이 사장은 회사 설립 후 공인인증 시스템은 국내에서 개발했다. 그는 처음 미국 베리사인 시스템 도입을 위해 미국을 방문해 그곳 사장과 만났으나 두 가지 이유로 방침을 변경했다.

하나는 자체 기술개발로 국내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점과 다른 하나는 외국업체에 기술 종속 우려와 비싼 로열티 때문이었다. 이 사장은 삼성SDS와 공동으로 3개월여 만에 국가암호 표준기술을 기반으로 한 사인게이트1(signgate 1)을 개발했다. 그해 9월 30일 사인게이트 정보인증센터를 준공했다.

그러나 정통부는 이보다 앞서 1998년 4월부터 전자상거래 활성화를 위한 전자서명 인증제 도입을 적극 추진해 왔다.

정통부 그해 4월 27일 전자서명(디지털서명)에 법적 효력을 부여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한 `전자서명법안`을 마련했다. 전자서명법안의 골자는 공인인증기관 등이 인증한 전자서명은 일반문서에 사용되는 인장이나 서명과 같은 법적 효력이 있다고 규정하는 내용이었다.

법안은 인증기관의 공신력 확보 및 이용자보호를 위한 관리제도 마련, 당사자 간의 분쟁 최소화를 위한 인증방법 및 절차 명시, 전자서명 및 전자문서에 법적효력 부여, 국제 간 전자상거래에 대비한 외국과의 상호인증 등도 명시했다.

전자서명이란 종이문서에 사용되는 서명(인감)과 같이 서명자 식별 및 변조 방지 목적으로 전자문서에 포함되거나 부착되는 기호나 부호를 말하며 문서 작성자는 비밀코드로 전자문서에 디지털서명을 부착하고 문서를 받아보는 사람은 공개코드(서명 검증키)로 디지털서명의 유효성을 확인토록 했다.

정통부는 이런 내용의 전자서명법 제정안을 그해 7월 27일 입법예고했다.

이 법안은 그해 12월 24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에 따라 1999년 7월부터 컴퓨터 및 정보통신망에서 오가는 전자문서에 사용되는 전자서명도 기존의 일반 종이문서에 사용되는 인감이나 서명과 같은 법적 효력을 갖게 됐다.

그동안 정보사회의 진전에 따라 인터넷 등 개방형 통신망에서 오가는 각종 전자문서의 이용량이 급증했으나 전자문서를 이용해 거래계약이나 대금결제 등의 법률적 행위로까지 발전하지 못했다.

1999년 4월 1일.

남궁석 장관은 정통부 회의실에서 열린 새해 업무보고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연내 전자서명 공인인증기관을 설립하겠다고 보고했다.

남궁 장관은 “신산업 창출과 고용확대를 위해 전자상거래를 활성화하고 전자상거래 신뢰성과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공인인증기관을 설립,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정통부에서 공인인증기관 설립을 총괄한 신용섭 당시 정보보호과장(방통위 상임위원 역임, 현 EBS 사장)의 말.

“당시 공인인증 업무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일이었습니다. PKI(Public Key Infrastructure)라는 개념조차 정리가 안 된 상태였습니다. 이론만 있는 상황에서 공인인증기관을 설립하려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엄청났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고민하고 실무진과 토론하고 외국사례를 조사하면서 작업을 해 나갔습니다.”

이성옥 정통부 정보기반심의관(정통부 정보화기획실장, 정보통신연구진흥원장 역임, 현 한국플랜트산업협회 부회장)의 회고.

“공인인증기관 설립 작업은 전적으로 신 과장이 실무를 총괄했습니다.”

신 과장은 전성배 사무관과 한국전자통신연구원과 한국정보보호진흥원(현 한국인터넷진흥원) 전문가들로 합동조사단을 구성해 2주간 독일에 보내 그곳 사례를 파악했다.

당시 공인인증기관 설립을 놓고 삼성과 LG, SK 등 대기업 간에 물밑경쟁이 치열했다.

신 과장은 이 분야는 외국 업체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이철수 한국정보보호진흥원장에게 자문을 구했다. 이홍섭 박사(한국정보보호진흥원장 역임, 현 건국대 석좌교수), 조현숙 박사(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사이버보안연구단장) 등과도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았다.

신 과장은 공인인증기관은 컨소시엄을 구성해 설립하기로 정부 방침을 변경했다.

정통부는 3월 29일 한국통신과 삼성SDS 등 6개사를 주요 주주로 확정했다. 그해 6월 1일 일반주주 모집을 위한 사업설명회를 열어 22개사 컨소시엄에서 자본금 200억원을 마련했다.

그는 전자서명법 시행령과 시행규칙 작업도 했다. 그해 6월 30일 시행령을 발표했고 이어 시행규칙은 8월 12일 확정했다.

정통부는 설립작업이 마무리될 4월 말께 초대 사장을 내정했다.

신 과장의 말.

“안병엽 차관(정통부 장관, 국회의원 역임, 현 KAIST 교수)에게 `초대 사장 선임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라고 보고 했더니 `이정욱씨로 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사전에 남궁 장관과 협의를 해 결정했을 겁니다. 남궁 장관이 이후 이 사장을 불러 내정을 통보하면서 설립을 지시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공인인증은 7월 7일 전자서명인증관리센터를 설립했다.

한국정보인증은 정부에서 2000년 2월 10일 1호 인증기관으로 지정받았다. 2호는 한국증권전산이며 3호는 금융결제원이다.

한국정보인증은 이정욱 초대 사장에 이어 강영철(데이콤 전략기획본부장 역임), 김인식씨(정통부 공보관, 정보통신공무원교육원장 역임, 현 한국스마트TV산업협회 부회장)가 사장 바통을 이어받았다. 현재는 국회의장 정무수석비관을 지낸 고성학씨가 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한국정보인증은 지난해 318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영업이익 44억원을 기록했다. 정보인증 출범은 남이 가지 않은 길에 세운 정보사회의 새 깃발이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