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력공사 주도로 개발한 전력선통신(PLC)칩으로 국내 스마트그리드와 전기자동차 등 미래 성장산업이 위기를 맞고 있다.
관련 업계는 현장 검증이나 글로벌 경쟁력이 확보되지 않았음에도 한전PLC의 적용만을 고집하고 있어 국내 산업화는 물론이고 해외 진출에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PLC는 전력선의 전원파형(60㎐)에 디지털정보를 실어 전송하는 스마트그리드 실현 통신 기반이다. 전기를 공급하는 과정에서 사용량과 요금부과 등 정보부터 해당 전력기기 운영 상태나 작동을 원격지에서 제어할 수 있다. 가정 등 수용가의 전력량계, 전기차 충전인프라, 가로등, 집단전기설비 등에 적극 활용되고 있다.
지난 2009년 한전PLC가 완성됐지만 상호운용성 등 완성도 부족으로 현재까지 설치된 사례는 없다. 반면에 해외업체는 이미 완성도 높은 PLC를 개발, 스마트그리드와 전기차 등의 분야에 이를 적용하며 해외시장을 선점하고 있다.
이에 관련 업계는 해외시장과 내수시장 모두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다고 주장한다. 한전PLC 탓에 글로벌 기업의 국내 전기차 시장 진출이 발목잡혔고 국내 업체마저도 국내외 시장을 나눠서 제품을 개발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해외 충전인프라 국제표준에 가로막혀 한전PLC는 `우물 안 개구리`로 전락할 위기에 놓였다는 점이다.
◇한전PLC, 위피(WIPI)의 패착 재현하나
한전PLC의 문제는 과거 모바일 업계를 흔들었던 위피(WIPI) 논란과 판박이다. 국내 기술과 산업을 지켜주던 장벽이 글로벌 트렌드에 뒤처진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모양새가 별반 다르지 않다.
위피는 과거 정보통신부를 주축으로 이동통신 3사 간 무선인터넷 콘텐츠 규격을 표준화한 플랫폼이다. 당초 개발 취지는 이동통신 3사가 각기 다른 플랫폼을 사용해 콘텐츠 사업자가 같은 콘텐츠를 중복 개발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3G 휴대폰에는 무조건 위피 플랫폼이 내장돼야만 제품 출시가 가능했다. 하지만 위피 플랫폼은 곧 국내 시장의 장벽으로 작용했다. 노키아나 블랙베리, 애플 아이폰 등 외산 휴대폰이 국내에 출시하려면 위피를 탑재해야 했다. 글로벌 회사 대부분이 이를 이유로 국내 시장에 휴대폰을 출시하지 않았다. 블랙베리가 초기 영업용으로만 판매되고 아이폰이 2년 뒤에 출시된 것도 위피 때문이었다.
문제는 위피라는 시장 장벽 안에서 국내 모바일 산업이 성장하다보니 정작 세계 시장에서는 우물 안 개구리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많은 콘텐츠 회사가 위피에 기반을 둔 콘텐츠 개발에만 매달렸고 해외 진출은 뒷전이었다. 정부는 위피를 수출한다는 계획도 가지고 있었지만 해외시장은 이미 무한경쟁 상황이었다. 삼성과 LG 같은 휴대폰 제조사는 내수용과 해외용 휴대폰을 별도로 생산하는 투트랙 전략을 구사했다.
소비자의 제품 선택 기회를 박탈하는 문제점도 있었다. 스마트폰 마니아들이 아이폰 대신 국내 스마트폰을 쓰는데 반감을 가지기 시작했고 결국 위피는 2008년 말 의무화 폐지와 함께 시장논리에 따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업계 관계자는 “한전PLC도 국내 기술과 산업을 보호하려는 장벽이지만 전기차나 스마트그리드 시장의 경쟁력 저하를 초래하고 있다”며 “향후 전기차 충전 인프라뿐만 아니라 스마트그리드 분야 해외사업 수주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한전PLC에 거부당한 국내 전기차 산업
산업통상자원부 기술표준원에 따르면 최근 독일 국제표준화기구(ISO)와 함께 충전기 국제표준인 `콤보(TYPE1)`와 한전의 AMI용 PLC 간 상호공존 테스트를 한 결과 통신 간섭이 발생했다.
정부는 국내 표준에 콤보 방식을 수용할 수 없다는 방침이다. 이달 GM을 시작으로 BMW, 폴크스바겐, 포드, 크라이슬러 등 대다수 완성차가 콤보를 따르고 있어 국내에서는 20분 전후 급속충전이 어렵게 된다. 향후 정부나 민간사업자가 설치하는 급속충전기에는 콤보를 적용할 수 없다.
한전PLC와 콤보의 통신방식(홈 플러그 그린PHY)은 같은 고속PLC칩으로 분류돼 동일한 주파수 대역을 사용한다. 하지만 콤보의 주파수 출력값이 강해 한전PLC 구동에 통신 간섭이 발생, 두 종류의 PLC를 모두 채택할 수 없다.
해외 완성차업체는 크게 반발하고 있다. 세계 전기차 시장이 콤보 방식으로 일원화하는 상황에서 한국 시장만을 위해 차량을 재설계해야 한다면 국내 진출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정작 현대·기아차도 차기 모델(쏘울EV)부터 콤보 방식을 채택할 방침이어서 콤보 방식 수용은 불가피하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더 큰 문제는 전기차 충전기 등 국내 산업계 해외경쟁력을 쌓는 데도 오히려 걸림돌이라는 지적이다.
정태영 전기차충전인프라위원장은 “업계는 국내외용 충전기 개발과 생산에 시간과 비용이 추가로 들기 때문에 글로벌 경쟁력을 잃게 된다”며 “다수의 전기차를 기다리는 고객을 위해서라도 정부는 공개적으로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데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 시장에서 거부당할 한전PLC.
정작 한전PLC도 세계 시장에서 거부당할 판이다. 국내 스마트그리드 원격검침인프라(AMI)가 한전PLC로 채워짐에 따라 통신 간섭을 이유로 콤보 방식 외산 전기차가 국내에 진출하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해외 여러 국가의 전기차 충전인프라가 콤보 방식으로 채워지기 때문에 한전PLC와의 통신 간섭 탓에 거부당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국산화를 위해 약 10년 동안 1000억원에 가까운 예산을 투입했지만 한국 이외에는 적용할 수 있는 시장이 없는 셈이다.
실제로 이달 말 사업 공고 예정인 우즈베키스탄 전력청의 대규모 AMI(원격검침인프라) 구축 사업에 한전·KT 등 국내 기업을 포함해 10여개 대형 컨소시엄이 입찰을 준비 중이지만 한전PLC는 입찰에서 제한됐다. 이에 한전도 외산 PLC칩을 채택해 사업을 추진 중이다. 결국 국산화를 추구했지만 정작 개발 주체조차도 국산화에 역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해외시장에서 한전PLC의 활용도가 국내로 제한됨에도 정부는 한전PLC를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박지식 스마트그리드 국가표준코디는 “한전PLC에 기반을 두고 국가 AMI 구축사업이 진행 중인 만큼 한전PLC 적용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콤보와 한전PLC가 공존할 수 있는 기술적인 문제 해결은 가능할 것으로 판단되지만 해외 완성차 등 관련 업계와 한전 간 이해관계 조율이 쉽지 않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표】글로벌 전기차 업계 충전표준 현황
【표】글로벌 스마트그리드용 통신표준 현황
박태준·조정형 기자 gaius@etnews.com